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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 한양
의 기억을
걷다

봉원사에서 인생을 돌아보다

요약 테이블
관련 장소 안산

안산에는 봉원사(奉元寺)라는 천년 고찰이 있다. 한국불교태고종(韓國佛敎太古宗)의 총본산으로 889년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했다고 알려졌다. 봉원사에는 독서당이 있어 조선 시대 선비들이 과거 공부를 위해 용맹정진하는 장소가 되기도 했다. 또한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이 스무 살 때 윤영(尹映)이라는 기인을 만나 소설 《허생전》의 소재를 얻은 곳이기도 하다.

봉원사 경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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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9년 음력 11월 16일 조선 후기 안동 김씨 세도 정치를 이끌었던 김조순(金祖淳)은 절친한 벗 김려(金礪) 등과 함께 봉원사를 찾았다. 그들은 눈 내린 달밤에 즐거운 마음으로 시를 짓고 시집의 이름을 '즐거운 마음'과 '좋은 일'이라는 뜻에서 상심낙사(賞心樂事)라 붙였다.

인생이란 고통스러운 순간도 지나고 나면 추억이 되는 법이다. 특히 김조순의 친구 김려에게는 이곳 봉원사에서의 만남이 더욱 특별했다. 파란만장했던 지난 삶을 반추하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김려는 노론 시파로 분류되던 김재칠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5세에 성균관에 들어가 27세에 진사시에 급제했는데 그때 평생 친구인 이옥과 김조순, 강이천 등을 만난다. 그런데 서른두 살 무렵 강이천의 죄목에 연루되어 함께 유배형을 받는다.

죄인 강이천을 제주목에, 김이백을 흑산도에, 김려를 경원부에 유배하였다. 1797년 11월 12일 《정조실록》의 기록이다. 정조의 치세 기간 이해하기 어려운 중형인데 죄목은 이렇다. "강이천이 바야흐로 천안에 있으면서 해랑적(海浪賊: 해적)들의 소설(騷屑)스러운 말로 시골 사람을 속여 의혹시키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혹세무민하고 다닌다는 말이다. 문체반정운동을 일으키며 급격하게 경박해지는 사회 풍조에 위기감을 느껴온 정조는 젊은 선비들의 자유분방함을 용납하지 않았다. 한때 전도유망한 선비였던 김려는 이 사건으로 유배지 두 곳에서 10년간이나 유배 생활을 하게 된다.

함경도 부령에 유배된 김려는 부령 주민과 허물없이 사귀어가면서 따뜻한 인정에 힘입어 유배 생활의 고통을 극복해갈 수 있었다. 현지 주민을 통해 그들이 처한 현실을 이해하게 되었고 유교적 질서에서 벗어난 본연의 인간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부령 관아의 관기인 연희와 다시 오지 않을 뜨거운 사랑을 나누게 된다.

4년 뒤 김려는 천주교도와 교분을 맺은 혐의로 다시 신유사옥(辛酉邪獄)에 연루되어 1801년 경상남도 진해로 유배지를 옮긴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 강행된 유배 길에 폐병이 악화한 김려는 하루에서 서너 차례 피를 토할 정도로 건강이 나빠지기도 한다.

살을 에는 북풍보다 한결 따뜻한 남쪽으로 옮겼지만 김려의 마음속에서는 서리가 내리고 있었다. 부령에서 사귄 기생 연희가 그리워 몸살이 날 지경이다. 하지만 유형에 처한 신분으로는 연희를 만날 길이 없었다.

작은 우산에 치마 끌며 술병 들고서 연희는 벌써 다리 건너 이쪽으로 오고 있네. …… 찢어진 창으로 벌써 들리네. 또각또각 발걸음 소리. - 《사유악부》

이제 그는 거의 환청을 들을 지경이다. 만날 수 없는 연인을 그리워하며 그토록 애를 태우다 지은 연작 시가 《사유악부(思牖樂府)》 290수다.

그대 어디를 그리워하나?
그리운 저 북쪽 바닷가
연못에 붉게 핀 연꽃 천만 송이
연희 생각에 더욱 사랑스럽구나
마음도 같고 생각도 같고 사랑 또한 같았으니
한 줄기 나란히 난 연꽃을 어찌 부러워했으랴?
평생 살면 즐거운 이가 원망스러운 이가 되고
좋은 인연이 나쁜 인연이 되는 건지?
하늘 끝과 땅끝이 산하에 막혀서
죽도록 부질없이 이별가만 불러대네.
전생에 지은 죄로 이생에서 이렇게 고생하는지
연희야!연희야!너를 어찌하랴!

죽도록 부질없이 이별가만 불러대네. 전생에 지은 죄로 이생에서 이렇게 고생하는지라며 절규하는 그의 한 맺힌 음성이 들려오는 듯하다.

1811년 김려의 유배 생활이 모두 끝났다. 그리고 친구 김조순의 도움으로 1812년 정릉참봉으로 다시 관직 생활도 시작한다. 마흔일곱이란 나이에 꼬인 인생이 풀리기 시작한 그다. 그 무렵 봉원사에서 친구들과 같이 밥을 먹은 뒤 승전봉에 오른 것이다. 아마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그날 일을 친구들 중 가장 잘나가던 김조순이 이렇게 썼다.

가슴이 탁 트였다. 북쪽 삼각산과 도봉산 쌓인 눈이 빛을 뿜고 휘황찬란하다. 서남쪽 한강은 꽁꽁 언 채 구불구불, 수십 리 걸쳐 파란 유리를 강물 위에 깔아놓은 듯하다. 긴 바람이 모래와 눈을 불어 마치 안개가 낀 듯 흐릿하다. 바위에 걸터앉아 술을 데우고 거문고를 타고 노래를 부르게 했다. 거문고 가락은 얼어서 그런지 더욱 운치 있고 노랫소리는 솔바람 소리와 어우러져 절절하였다.

김조순의 <봉원사 유람을 기록하며(記奉元寺遊)>란 산문이다. 그때 김려는 친구들 사이에서 거문고 가락을 들으며 부령에서 사랑을 나눴던 연희를 또 그리워했을까?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조선왕조 역대 임금들의 실록(實錄)을 통칭하는 편년체 사서. 태조에서 철종까지 472년간에 걸친 25대 임금들의 실록 28종을 일컫는다. 국왕이 교체될 때마다 사관들이 다양한 자료들을 모아 편찬했다. 1,893권 888책. 필사본·영인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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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관 집필자 소개

《월간축구》, 《골든에이지》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조선의 군주와 역사에 관심이 많아 《월간중앙》과 《한경리쿠르트》 등에 조선 역사의 흥미로운 이야기와 조선 군주의 리더십에 관한 글을 연재한 바..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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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양의 기억을 걷다
서울, 한양의 기억을 걷다 | 저자김용관 | cp명인물과사상사 도서 소개

한양 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안산, 인왕산, 북악산, 낙산, 남산을 시작으로 서울의 성곽, 마을, 강으로 이어지는 한양의 역사를 하나하나 탐색한다. 조선의 왕, 지식인,..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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