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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
안암동과 종암동의 명품 돌
관련 장소 | 안암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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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암동에는 큰 바위가 있었는데 십여 명이 편히 앉아 쉴 만하다고 해서 '앉일바위'라 부른 데서 안암(安岩)이란 동명이 유래했다.
동대문 밖 안암동에서 어떤 바위가 온종일 쩌렁쩌렁 울다가 갈라지자 흰 연기가 하늘로 올라갔다는 일이 도성에 전파되었습니다. 해괴하게 여겨 본부의 관원을 시켜 가서 살펴보게 하였더니 그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모른다고 했습니다. 또 그 바위 위에는 돌을 뜬 데가 많았지만 흔적이 이미 없어져서 갈라진 형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돌을 뜬 사람은 충의위 윤희로와 은천감 명강이었습니다. 금산(禁山)에서 돌을 벌채해 간 죄를 추문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임금은 이렇게 전교했다. "이 바위가 울었다는 일은 전에도 이번보다 더 큰 와언(訛言)이 있었으니 사실로 받아들일 수 없다." - 《중종실록》, 1540년 4월 17일
이 기사는 안암동에서 누가 돌을 채취해 간 뒤 도성에 해괴한 소문이 돌았다며 불법으로 돌을 채취한 자를 적발해 보고한 것이다. 하지만 좋은 돌은 안암동보다는 종암동에 많았다. 종암동 서쪽에는 채석장으로 사용했던 진석산이 있는데, 이곳에서 나온 돌은 재질이 좋아 1960년경까지도 고급 주택을 지을 때 사용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을 지을 때에도 이곳의 돌을 일부 사용하였다.
종암동 동명은 고려대학교 뒷산에 있는 북처럼 생긴 커다란 바위에서 유래했는데 북바위라고도 하고 한자로는 종암(鐘岩) 혹은 고암(鼓岩)이라 불렀다. 북바위 부근의 토지는 곡식이 잘 여물기로도 유명했다. 하루는 태종이 몰래 우의정 박은의 집에 이르렀다가 박은이 조밥을 먹는 것을 보고 "한 나라의 재상으로서 이렇게 가난해서야 되겠느냐?"라고 말하고 북바위밭(고암전) 몇 마지기를 주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조선왕조 역대 임금들의 실록(實錄)을 통칭하는 편년체 사서. 태조에서 철종까지 472년간에 걸친 25대 임금들의 실록 28종을 일컫는다. 국왕이 교체될 때마다 사관들이 다양한 자료들을 모아 편찬했다. 1,893권 888책. 필사본·영인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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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안산, 인왕산, 북악산, 낙산, 남산을 시작으로 서울의 성곽, 마을, 강으로 이어지는 한양의 역사를 하나하나 탐색한다. 조선의 왕, 지식인,..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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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안암동과 종암동의 명품 돌 – 서울, 한양의 기억을 걷다, 김용관, 인물과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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