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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
만인이 짓밟고 다니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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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교(廣橋) 혹은 대광통교(大廣通橋)는 도성 안에 있는 가장 큰 다리라는 뜻이다. 태종은 태조가 승하하자 오늘날 정동에 있던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무덤인 정릉을 덮고 있던 무게 8톤에 이르는 혼유석을 걷고 천장(遷葬: 능을 옮김)하라 지시했다. 이때 정릉이 지금의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겨졌다. 태종은 걷어낸 혼유석과 많은 석물들을 흙다리였던 대광통교를 돌다리로 개조하는 데 사용했다. 신덕왕후의 강한 혼을 잠재우기 위해 한양의 중심가 다리로 만든 것이다. 혼유석을 많은 사람이 짓밟고 다니는 것을 봐야 마음이 편해 그리했을 것이다.
큰비가 내려 물이 넘쳐서, 백성 가운데 빠져 죽은 자가 있었다.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광통교의 흙다리가 비만 오면 곧 무너지니, 청컨대 정릉(貞陵) 옛 무덤의 석물(石物)로 돌다리를 만드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고 물으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 《태종실록》, 1410년 8월 8일
광교는 정월 보름날 밤에 다리를 밟으면 한 해 다릿병을 면하게 해준다는 다리밟기 장소로도 유명했다. 종각에서 보신각 종소리를 들은 다음 가까운 광교와 수표교로 나가 다리 위를 밤새도록 오가며 북을 치고 퉁소를 불기도 한다. 이날은 남녀노소가 섞여 매우 혼잡했으므로 풍기상의 폐단도 생겨 다리밟기를 법령으로 금지하는 사례까지 있었다.
한편 현재 덕수궁 자리는 본래 세조의 큰손자인 월산대군의 개인 저택이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으로 의주에 피신했던 선조가 다시 한성으로 돌아오면서 이곳을 임시 거처로 삼아 정릉동 행궁(貞陵洞行宮)이 되었다. 광해군 때 다시 중건되어 경운궁으로 바뀌었고, 1618년에는 인목대비가 이곳에 유폐되기도 한다. 현재의 덕수궁이란 명칭을 얻게 된 것은 1907년 순종에게 왕위를 양위한 고종이 이곳에 살면서부터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조선왕조 역대 임금들의 실록(實錄)을 통칭하는 편년체 사서. 태조에서 철종까지 472년간에 걸친 25대 임금들의 실록 28종을 일컫는다. 국왕이 교체될 때마다 사관들이 다양한 자료들을 모아 편찬했다. 1,893권 888책. 필사본·영인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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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안산, 인왕산, 북악산, 낙산, 남산을 시작으로 서울의 성곽, 마을, 강으로 이어지는 한양의 역사를 하나하나 탐색한다. 조선의 왕, 지식인,..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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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만인이 짓밟고 다니게 하라 – 서울, 한양의 기억을 걷다, 김용관, 인물과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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