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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기억을
걷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이는 거리
관련 장소 | 종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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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라는 명칭은 종로 네거리에 도성을 여닫고 인정(人定)과 파루(罷漏)를 알리는 종을 매단 종루(鐘樓)가 세워져 있던 데서 유래되었다. 한양의 가장 오래된 도로이며 상징 도로다. 종각(鐘閣)은 처음에 청운교(靑雲橋) 서쪽에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 종로 네거리로 옮긴 것은 1413년의 일이다. 실록에는 "1413년(태종 13년) 2월 6일, 청운교의 서종루(西鍾樓) 2층 5간을 순금사의 남쪽, 광통교(廣通橋)의 북쪽에 옮기고 4월 11일 종루가 완성돼 종을 내다 걸었다"라고 기록돼 있다. 1431년 9월 12일에는 종루에서 숭례문까지 등을 달고 불을 켜서 악공 18명에게 소리를 하며 즐기게 했는데, 이를 노등(路燈)이라 불렀다.
끝없는 인가에 켠 끝없는 등불 붉은빛이 서로 쏘아 흐르는 노을 같네. 옥승(玉繩) 끝에 나직이 드리운 명월주(明月珠) 경지(瓊枝)에 환술로 핀 듯한 영롱한 꽃들 어두운 거리를 환히 비춰 대낮을 만드니 구경꾼들 좋아라고 원숭이처럼 뛰노네. 구가(九街)의 가취(歌吹)가 태평곡을 부르니 오경을 알리는 새벽 종소리도 깨닫지 못하네. - 이승소, <종가관등(鍾街觀燈)>
'한도십영' 중 하나로 꼽히는 종로의 등불 구경 풍경을 그린 시다. 종로를 또 운종가(雲從街)라 부르기도 했다. 운종가는 많은 사람이 구름같이 모였다 흩어지는 거리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조선 시대 종로 일대는 시전(市廛)이 설치되어 육의전을 비롯한 많은 점포가 집중적으로 발달되어 있었다.
또 종로에는 표준시를 알기 위한 경루(更漏: 물시계)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세종 대에 이르러 장영실 등이 만든 물시계인 자격루(自擊漏)로 발전한다.
광화문우체국 부근에는 혜정교(惠政橋)라는 다리가 있었다. 광화문 북쪽에서 흘러내린 중학천이 청계천으로 유입되었는데 혜정교는 종로 쪽에 놓인 다리를 가리킨다. 이 다리 옆에 우포도청이 있었기 때문에 포청다리라고도 했다. 혜정교에는 가마솥이 있었다. 죄인을 삶아 죽인다는 엄포용으로, 일종의 전시효과를 얻기 위한 소품이었다. 이곳은 백성이 많이 모이는 종로 거리면서 육조 거리가 마주치는 곳인 동시에 죄인을 다스리는 우포도청 앞이므로 공개 처형 터로는 최상의 장소였다.
1434년(세종 16년) 10월 2일에는 혜정교와 종묘에 해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晷)를 설치해 백성이 널리 시간을 알 수 있도록 했다. 앙부일구는 청동으로 만든 가마솥 모양의 해시계인데 시각뿐만 아니라 계절도 알 수 있게 제작되었다. 혜정교 아래로는 죄수를 관리하는 전옥서가 있었다. 오늘날 무교동 사거리 부근이다.
날씨가 너무 춥다 하여 승지를 보내 전옥서의 죄수들을 살펴보게 하였는데 빚 때문에 갇혀 있는 자들이 많았다. 그리하여 상이 하교하기를 "요즘 각 아문에서 도하 백성들에게 돈을 대여해주고 매월 이자를 받고 있는데 그것이 사체를 손상시키는 일일 뿐만 아니라 그를 가두고 추징하고 하다 보면 틀림없이 깊은 원한이 쌓일 것이다. 그 폐단을 없애지 않으면 가난한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질 염려가 있고, 감옥은 비어 있을 때가 없을 것이다. 지금부터는 각 아문에서 돈 빚 놓는 폐습을 일체 없애도록 하라" 하였다. - 《국조보감》, 163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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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안산, 인왕산, 북악산, 낙산, 남산을 시작으로 서울의 성곽, 마을, 강으로 이어지는 한양의 역사를 하나하나 탐색한다. 조선의 왕, 지식인,..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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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이는 거리 – 서울, 한양의 기억을 걷다, 김용관, 인물과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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