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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기억을
걷다
도성에 담긴 한양
200년 전 도성 속 한양은 어떤 모습일까? 대궐보다 높은 집은 없고 다만 오늘날 탑골공원에 있는 백탑만이 우뚝 솟아 있었다. 남산에서 한양을 굽어보면 기와집들이 낮게 깔렸다. 1790년대 무렵 한양 인구는 20만 명이었고 밤 10시면 종로 네거리에 있는 종각에서 인정(人定)이 스물여덟 번 울렸다. 그러면 성문이 닫히고 한양 도심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그리고 새벽 4시경엔 서른세 번 파루(罷漏)가 울려 성문이 열렸다. 또 하루가 시작되는 것이다.
남주북병(南酒北餠)이란 말이 있다. 남촌 사람들은 술 빚어 마시는 걸 즐겼고 북촌 사람들은 떡 만들어 먹기를 즐겼다는 뜻이다. 남산 일대 필동, 묵정동, 회현동, 인현동 등은 남촌이고 계동, 재동, 가회동, 안국동, 원남동 쪽은 북촌이다.
북촌은 벌열(閥閱) 가문들이 세거한 곳이다. 반면 남촌은 권력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그러니 불우한 사람들은 술을 즐겨 찾았고 세도를 누리는 사람들은 떡을 자주 만들어 잔치를 즐겼을 것이다. 영조의 금주령은 북촌 사람들이 떡을 하는 것은 사치라 보지 않고 남촌 사람들이 굶주림에 술로 허기를 채우는 것은 사치로 보았다. 이처럼 높은 사람은 아랫사람들 삶의 팍팍함을 잘 모르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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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안산, 인왕산, 북악산, 낙산, 남산을 시작으로 서울의 성곽, 마을, 강으로 이어지는 한양의 역사를 하나하나 탐색한다. 조선의 왕, 지식인,..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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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도성에 담긴 한양 – 서울, 한양의 기억을 걷다, 김용관, 인물과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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