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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
관악산의 화기를 잠재우는 연못
관련 장소 | 숭례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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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崇禮門)은 주로 남대문(南大門)이라 불린다. 현존하는 한국의 성문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다. 1398년 2월 8일 완공됐다. 도성 문들이 대개 임진왜란 때 소실됐으나 숭례문은 온전히 보전됐다. 1962년 12월 20일에는 국보 제1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문이 만들어진 지 610년 만인 2008년 2월 10일 발생한 화재로 2층 문루(門樓: 성문 따위의 바깥문 위에 지은 다락집)가 소실되고 1층 문루 일부가 불에 탔다. 국보 1호 숭례문이 불에 타 무너지자 많은 국민이 국화꽃을 들고 나와 땅을 치며 통곡했다.
화재 당시 소방관의 노력으로 길이 3.5미터, 폭 1.5미터 무게 150킬로그램인 숭례문 현판은 화마에서 구할 수 있었다. 《한경지략》을 보면 숭례문 현판이 임진왜란 중 사라져 다시 써서 달았지만 다는 대로 떨어지는 바람에 모든 사람이 의아해했다고 한다. 그런데 광해군 때 청파동 배다리 밑 웅덩이에 서광이 비쳐 사람들이 이상히 여겨 파보니 숭례문 현판이 나와 다시 달 수 있었다고 한다.
숭례문 현판 글씨가 누구의 작품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처음에는 정도전의 글씨라는 설도 있다가 다시 양녕대군이 쓴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에는 중종 때 학자인 유진동(柳辰仝)이 썼다는 설도 있다.
숭례문 남쪽에는 연못이 있었다. 1413년(태종 13년) 2월 10일 남쪽에 못을 팠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역사는 연못을 운하와 연결하려는 의도로 시작됐으나 많은 비판에 직면한다. 헛되이 백성의 노동력만 낭비할 뿐, 실용성이 전혀 없고 조운(漕運)은 불통(不通)할 것이라는 얘기다. 실록에도 이런 불평이 기록돼 있다. 태종은 카리스마 넘치는 군주였지만 운하를 고집하지 않았다. 여러 비판을 종합해 결국 운하 건설 계획을 포기한다.
태종의 운하 건설 계획은 숭례문 아래 남지 부근에 선박 7~8척을 동시에 선착할 수 있는 제법 규모가 큰 나루를 건설하는 계획이었다. 신빙성은 없지만 숭례문에서 용산까지 이어지는 운하가 있었다면 숭례문이 지금처럼 화마를 입지 않았을 것이란 풍수지리학자들의 말도 들린다.
한편 숭례문은 외침의 역사와 함께하기도 했다.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숭례문을 통해 한양에 입성했고, 1597년(선조 30년) 2월 8일, 선조는 숭례문 앞 연못에서 명나라 장수 심유경에게 성대한 전별연을 베풀어주기도 한다.
이런 숭례문 연못이 언제 메워졌는지는 알 수 없다. 세조 때 한명회는 도성에 화마가 끊이질 않자 한양으로 천도할 때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고자 팠던 남지를 메운 탓이라 여기고, 이를 복구하길 청한다는 상소를 올린다. 이를 보면 숭례문 연못은 다시 팠다가 메우길 반복한 듯하다. 1896년 《독립신문》에는 "고니를 남지에 놓아주어 고니가 물고기와 함께 그곳에서 쉬었다"라는 글도 보인다. 그렇다면 백 년 전에는 숭례문에 연못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백조 대신 고니란 말처럼 고니가 떠 있을 숭례문 연못을 상상해보면 재미있다. 지금까지도 숭례문 앞에 연못을 만들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가뭄이 심하면 숭례문을 닫고 숙정문을 여는 풍습도 있었다.
가뭄이 극심했기 때문에 숭례문을 닫고 숙청문(肅淸門)을 열었다. - 《선조실록》, 1576년 5월 4일
관악산 화기가 날이 가물면 더 극성을 부려 이런 풍습이 생겼다고 한다. 1469년(예종 1년) 7월 13일에도 저자(시장)를 동현으로 옮기고 숭례문을 닫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가뭄이 심하다 하여 저자를 동현(銅峴)으로 옮기고 숭례문을 닫게 하였다. 예전 일에 가물면 저자를 옮기고 숭례문을 닫았는데, 이때에 한재(旱災)가 매우 심한 데에 이르지는 않았으나, 임금이 백성의 일에 마음을 졸이고 농사를 상하게 할까봐 깊이 두려워하여, 무릇 가뭄을 구하는 일이라면 거행하지 않는 바가 없었다.
또한 숭례문에는 노등(路燈)이라고 하여 숭례문에서 종로까지 열 자 간격으로 종이 등을 달고, 예불(禮佛)하며 노래하고 놀던 풍습도 있었다.
창성이 두목을 시켜 지등(紙燈) 7백 개를 만들어 숭례문에서부터 누문·종루·야지현·개천로 위에까지 열 자가량씩 격하여 길 위에 잇달아 등을 달고 불을 켜서 예배를 행하고, 악공 18명과 승도 20명으로 하여금 소리를 하며 즐겼는데, 이름을 노등이라고 불렀다. - 《세종실록》, 1431년 9월 12일
한경지략(漢京識略)
조선 시대 한성(漢城)의 역사를 간략하게 서술한 책. 연대는 미상이며, 저자는 유득공의 아들 유본예로 추정되는 수헌거사(樹軒居士)다. 2권 2책. 필사본.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조선왕조 역대 임금들의 실록(實錄)을 통칭하는 편년체 사서. 태조에서 철종까지 472년간에 걸친 25대 임금들의 실록 28종을 일컫는다. 국왕이 교체될 때마다 사관들이 다양한 자료들을 모아 편찬했다. 1,893권 888책. 필사본·영인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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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안산, 인왕산, 북악산, 낙산, 남산을 시작으로 서울의 성곽, 마을, 강으로 이어지는 한양의 역사를 하나하나 탐색한다. 조선의 왕, 지식인,..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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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관악산의 화기를 잠재우는 연못 – 서울, 한양의 기억을 걷다, 김용관, 인물과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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