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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
홍지문과 탕춘대
관련 장소 | 홍지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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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에서 홍지문(弘智門)을 거쳐 탕춘대와 이어지며 북한산 줄기로 뻗은 능선이 있다. 종로구 신영동 136번지에 있던 돈대로서, 1505년(연산군 11년) 이곳에 탕춘대를 마련하고 앞 냇가에 수각을 짓고 미희들과 놀았던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왕이 창의문 밖 조지서 터에 이궁을 지으려다 먼저 탕춘대 봉우리 위에 황각을 세우고 언덕을 따라 장람을 연하여 짓고 모두 청기와로 이으니 고운 색채가 빛났다. - 《연산군일기》, 1506년 1월 27일
탕춘대 위에 청기와 정자가 웅장하게 들어섰다는 이야기다. 홍지문은 탕춘대성을 쌓으면서 만든 문이다.
괴롭고 괴로운 이조 참의를 아직도 벗어나지 못했습니까? 비 온 뒤라서 탕춘대 아래의 폭포수가 한창일 것인데 훨훨 날아 함께 가서 구경할 수 없는 것이 애석합니다. 약용은 근래에 주대소(朱大韶)를 본받아 새벽에 일어나면 맨머리로 쾌각(快閣)의 위에 앉아 오색 붓으로 고서 몇 장씩을 평하고, 이어서 허 미수(미수는 허목의 호)가 칡 붓으로 과두체(蝌蚪體)를 쓰느라 산 밖의 일은 알지 못했던 것을 사모했습니다. 어떤 무인(武人)이 찾아와, 하루살이가 큰 나무를 흔들려 했으므로 한 차례 성내었고 융숭한 성비(聖批)가 계시어 더한층 영광스러웠다고 하던데, 저에게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 《다산 시문집》 제18권, 서(書)
1795년 주문모 신부의 변복잠입사건이 터지고, 정조는 수세에 몰린 정약용을 보호하기 위하여 병조참의에서 금정찰방으로 좌천시켰다. 이 편지는 다산이 금정에서 채제공의 아들 채홍원에게 보낸 편지다. 젊은 시절 채홍원과 함께 놀던 탕춘대 아래 폭포수 등이 그립다는 편지다.
홍지문에서 홍제원 방향으로 더 가면 옥천암이 나온다. 이곳 보도각에 있는 마애보살 좌상은 전체적으로 흰색 호분이 칠해져 있어 보도각백불(普渡閣白佛)로도 불린다. 별도로 독립된 불암(佛巖)에 새겨진 이 장대한 마애불상은 고려 초기부터 유행하던 큰 보관을 쓰고 있는데 그 모습이 인상적이다. 뿔처럼 생긴 관대에는 화려한 꽃무늬 수술이 장식돼 있다.
부처의 얼굴은 타원형인데 양감이 비교적 부드럽고 눈, 코, 입이 단아하다. 12, 13세기 고려 시대 마애불상 양식의 대표적 걸작으로, 뒷면에는 소원을 빌면서 바위를 갈았던 붙임바위가 남아 있어 민간 신앙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흥선대원군의 부인도 아들 고종을 위해 이곳에서 기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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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안산, 인왕산, 북악산, 낙산, 남산을 시작으로 서울의 성곽, 마을, 강으로 이어지는 한양의 역사를 하나하나 탐색한다. 조선의 왕, 지식인,..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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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홍지문과 탕춘대 – 서울, 한양의 기억을 걷다, 김용관, 인물과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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