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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기억을
걷다
남산에서 처음 만난 박제가와 이덕무
관련 장소 | 남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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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상보다 한 세대 아래로 남산 아래에 살며 어수룩한 사람으로 통하던 사람이 있었으니 평생 이만 권이 넘는 책을 읽었다는 이덕무다. 그는 날카롭고 고고한 이인상과는 풍기는 분위기가 달랐다. 이인상처럼 키는 훤칠하게 컸지만 가난에 절은 연약한 골방 샌님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집에 쌓인 눈이 녹아 물이 뚝뚝 떨어지면 어쩌다 찾아온 손님은 도포 자락 버리기 일쑤인 그런 허름한 곳에서, 그는 책을 읽다가 서쪽으로 난 창에 턱을 괴고 온종일 생각에 빠져 있곤 했다.
나는 책을 좋아하는 것이 마치 여색을 좋아하는 것과 같다. 요즘 나는 유행하는 풍열 때문에 오른쪽 눈이 가렵고 아프다. 사람들은 그런 나를 보고 책을 많이 읽어서 생긴 병이라고 한다. 그런 말은 나도 동감한다. 그러나 나는 단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매번 실눈을 뜨고 글자와 먹 사이의 정수에 집중할 때면 맥망(脈望: 책벌레)이 신선이라는 글자만을 갉아먹는 방법으로 책을 읽고는 했으니, 저 호색 때문에 죽는 사람들도 당연히 나를 비웃을 것이다.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빛도 사라지고 골방에 다시 어둠이 찾아오면 추위와 배고픔을 잊기 위해 줄곧 책만 보는 바보. 그런 그를 박지원은 청장(靑莊)이라 불렀다. "청장이란 맑고 차가운 연못에 고독하게 서서 모든 것을 잊어버린 듯 날개를 접고, 움직이지 않는 새를 말한다. 용모는 게으른 듯하고, 그 안색은 망연하고, 고요한 모습은 노래를 듣는 듯하고 머물러 있는 모습은 문을 지키는 듯하다. 그래서 청장은 편안해 보이는 것 같지만 항상 배가 고프고 늘 굶주려 있는 새다. 그 새처럼 평생 게으른 듯, 고요히 노래를 부르는 듯 열심히 움직이지만 먹이를 구하지 못한 둔하고 어수룩한 새, 이덕무는 그 새와 너무 흡사하다."
어느 날 이덕무가 남산 아래 백동수(白東脩) 집을 방문한다. 백동수는 이덕무의 처남이기도 해서 젊은 시절 자주 교류했다. 고개를 숙이고 백동수의 방문을 들어가려던 이덕무는 문 위에 초어정(樵漁亭)이란 글씨가 붙어 있는 것을 보고 유심히 살핀다. 그 글자의 필획이 힘차고 생동감이 있어 누구의 글씨냐고 묻자 백동수는 박제가(朴齊家)의 글씨라고 답했다.
그다음 해 봄 내가 다시 백동수를 찾아가는데, 남산에서 흘러나오는 시냇물이 철철 문밖으로 흐르고 있었다. 이때 한 동자가 점잖은 걸음으로 시내를 따라 북쪽으로 가는데 흰 겹옷에 녹색 띠를 매었으며 매우 만족스러운 듯하였다. 이마는 헌칠하고 눈은 응시하는 듯하였으며 낯빛이 부드러워 기걸한 남아였다.
나는 이 사내가 바로 박제가라 생각하고 길 가다 주시하고 있으니 동자도 마음에 짚이는 듯 눈여겨보고 지나갔다. 나는 속으로 이 사람이 반드시 나를 뒤따라 백 씨의 집으로 오겠지 하였는데 조금 지나자 동자가 과연 매화시(梅花詩)를 바치면서 인사를 하였다. 나는 신기(神氣)를 살피고 말을 물어보며 지절(志節)을 묻고 성령(性靈)을 대조해보았는데 매우 마음에 들어 즐거움을 견딜 수 없었다. - 《청장관전서》, <아정유고(雅亭遺稿)> 3권
비록 퇴락한 집에서는 바람이 스며들고 비가 샜으며 나이는 아홉 살이나 많았지만, 박제가를 대할 때는 등잔불을 중간에 갖다놓고 고요하게 여러 가지 책을 펴 놓고는 숨김없이 이야기하곤 했다. 박제가가 매화시 두 편을 들고 인사를 했다는 구절은 중국 송나라 때의 시인인 임포의 고사를 흉내 낸 것이다.
임포는 서호의 고산(孤山)에 은거하며 20년 동안 성시(城市)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던 인물로 서화와 시에 능하였고 특히 매화시가 유명했다. 장가를 들지 않아 자식이 없었는데, 매화를 심고 학을 길러 짝을 삼던 그를 당시 사람들은 매처학자(梅妻鶴子: 매화가 처고 학이 자식이란 뜻)라 불렀다. 이덕무가 그의 고사를 인용한 것은 은둔한 두 사람이 평생 우정을 나누자는 뜻이다.
한편 이덕무의 처남인 백동수는 호가 야뇌(野餒)로 '들판에서 굶주리는 사람', '떠돌아다니며 고생스러운 생활을 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그의 증조할아버지는 평안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백시구였지만 아버지가 첩의 소생인 서자였기 때문에 그도 서얼 신분이었다. 양반의 자손이라도 첩의 소생은 관직에 나가는데 일정한 제한을 두었기 때문에 백동수는 가슴에 한을 품고 무예를 연마했다. 1789년(정조 13년) 장용영 초관이 된 백동수는 이덕무, 박제가 등과 함께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편찬했다.
국역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덕무(李德懋)의 저술을 모은 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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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안산, 인왕산, 북악산, 낙산, 남산을 시작으로 서울의 성곽, 마을, 강으로 이어지는 한양의 역사를 하나하나 탐색한다. 조선의 왕, 지식인,..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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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남산에서 처음 만난 박제가와 이덕무 – 서울, 한양의 기억을 걷다, 김용관, 인물과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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