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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 한양
의 기억을
걷다

흐르는 시냇물을 베개 삼아

요약 테이블
관련 장소 북촌

창덕궁 서쪽 원서동이 침류대(枕流臺)다. 흐르는 시냇물을 베개 삼은 곳. 지금은 상상이 가지 않는 풍경이다.

예로부터 임 찾는 것은 때가 있다는데 당신께서는 무슨 일로 이리 늦으셨어요.

내가 온 것은 오직 당신과 시(詩)를 논하라는 열흘 기약이 있어서요. - 《촌은집(村隱集)》

유희경의 문집에 실린 이 시는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시로 옮긴 것이다. 사내는 물론 유희경이고 여자는 16세기 최고의 가인(佳人)이었던 매창(梅窓)이다. 매창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시가 있다.

이화우(梨花雨)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임도 날 생각하는가? 천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하노라!

시어 가운데 이화우란 단어만큼 많은 사연을 지닌 말이 또 있을까? 하얀 배꽃이 비 오듯 흩날리던 날, 떠나는 연인을 붙잡고 울며불며 이별했지만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이 되어도 소식이 없다. 이 시에는 떠나간 임을 그리워하며 슬픔에 젖은 여인의 마음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이 여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사내가 누구인지 참 궁금하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사내는 바로 앞서 나온 시를 지은 유희경이다. 천민 시인 유희경. 게다가 여인과는 스물여덟 살이라는 나이 차까지 있다.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지만 아버지뻘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유희경은 한양에서 삼당시인(三唐詩人: 백광훈, 최경창, 이달)에 버금가는 유명세를 누리고 있었다. 천민 신분이지만 양반 못지않은 시재를 타고났다고 칭찬들이 자자했다.

매창을 만나던 그해에 유희경은 남도를 여행 중이었다. 남도에서 의병장으로 유명한 고경명을 만나러 가는 길에 잠시 부안에 들렀다가 매창의 시와 거문고 가락을 듣고 홀딱 반해버린 것이다. 아니 매창이 그에게 먼저 반한 것이다. 유희경이 살던 시대는 임진왜란 전과 후로 구분된다. 임진왜란 전에는 시풍이 활달하여 양반뿐 아니라 천민들도 시를 읽고 쓰는 것이 그리 유별난 일은 아니었다. 유희경과 백대붕은 천민 시인 가운데도 으뜸이었다. 여인은 "유(劉)와 백(白) 두 사람 중 누구입니까?"라고 묻는다. 이미 두 사람의 명성이 부안에도 자자했다는 말이다.

도성에 염문을 뿌리고 다니던 기생 매창은 허균의 애인이냐 아니냐를 두고 말이 많았다. 전라감사 한준겸 혹은 훗날 인조반정의 공신으로 서인을 이끌게 되는 이귀의 애인이라는 소문도 자자했다. 하지만 매창의 진짜 애인은 유희경일 가능성이 높다. 매창의 속마음이야 매창 자신만이 알 테지만, 가능성이 높다고 말하는 이유는 기생이라는 신분상 둘은 비슷한 구석이 많았기 때문이다.

취한 손님이 명주 저고리 옷자락을 잡으니, 손길을 따라 명주 저고리가 소리를 내며 찢어졌어요. 명주 저고리 하나쯤이야 아까울 것 없지만, 임이 주신 은정(恩情)까지 찢어졌을까 그게 두렵습니다.

매창이 쓴 <증취객(贈醉客: 취한 손님에게 드림)>이라는 시다. 비록 술자리 인연이지만 좋은 감정을 유지하고 싶다는 이 시를 읽어보면, 비록 기생이지만 함부로 할 수 없는 기품이 느껴진다.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우리 집은 서울에 있어,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보지 못하네. 오동나무에 비 뿌릴 때 당신 생각에 더욱 애가 타는구나. - 유희경, <회계랑(懷癸娘)>
꿈에서 깨니 비바람 근심스럽고, 세상살이 어려움에 신음합니다. 대들보 위 은근한 제비는 어느 날에나 임 불러 돌아올까요. - 이매창, <자상(自傷)>

이처럼 매창이 죽을 때까지 간절하게 보고 싶어 한 사내인 유희경이 살던 동네가 바로 창덕궁 서편 침류대다. 하지만 창덕궁 서편과 경복궁 동편 사이 어디쯤이라고 전해질 뿐, 확실히 밝힌 문헌은 없다. 다만 유희경의 문집 《촌음집》 <행록> 편에 있는 "집이 정업원 하류에 있는데 물가 가까이 돌을 쌓아 대를 만들어 침류대라 이름하고 그 옆에 복숭아와 버드나무 수십 그루를 심었다. …… 나중에 땅이 궁궐로 편입돼 도총부 자리로 삼았다"와 같은 기록들을 모두 종합하면 창덕궁 안일 수도 있다.

유몽인의 《유희경전》에는 "그는 분수에 넘치는 행동을 전혀 하지 않았고 사람이 깨끗하고 충성스러웠다. 주인을 섬기는 마음이 깍듯하여 사람들이 그를 좋아했다"라고 적고 있다. 또한 《촌음집》 제2권에는 "유희경은 토지가 없어 가난하게 살았는데 요금문 밖에 오두막집을 짓고 살았다. 궁궐과의 거리는 5척 정도로 가까웠다"라고 기록돼 있다.

그는 타고난 신분이 종이지만 한 주인에게 매인 종은 아니고 빌어먹고 다니는 종이었다. 하지만 시를 짓는 재주가 탁월해 당대 최고 문인이었던 박순을 사사했고, 남언경에게 예학을 전수받았다.

유희경은 상례(喪禮) 전문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예학을 두루 배워 상례에 아주 밝았고 국상(國喪)을 주관했을 정도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또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몸소 의병을 일으켜 싸웠다. 관군을 도운 공을 인정받아 전쟁이 끝난 후 천인의 신분을 면했고, 다시 품계가 정3품인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침류대에 은거해 살았다.

광해군 때 이이첨이 인목대비를 폐하기 위해 여러 부로(父老)들을 협박해 상소를 올리라고 하자 유희경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 일로 이이첨과도 멀어졌으나 인조반정이 일어난 후 그 절의가 인정되어 종2품 가의대부(嘉義大夫)까지 오른다. 이렇게 높은 지위에 학문 또한 밝고 겸손하여 주위에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유희경이 교류했던 문인들은 이정구, 한준겸, 이수광, 김상용, 김상헌, 남이공, 장유, 홍서봉 등으로 매우 폭넓은 인맥을 쌓았다.

창덕궁 뒤편 옥류정

이 부근에 침류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확실치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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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경이 살던 공간인 침류대는 당시 조선 최고의 문화공간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침류대는 흐르는 물을 베개로 삼는다는 의미다. 그 옆에는 복숭아나무와 버드나무 10여 그루를 심었는데 봄이오면 붉은 꽃과 푸른 잎이 계곡을 밝게 비춰 장관을 이뤘다고 한다. 그러면 유희경은 그곳에 기대 누워 온종일 시를 읊조리곤 했다. 그가 그곳에서 이름 있는 문인들과 시로 화답했던 내용을 묶은 것이 《침류대시첩(枕流臺詩帖)》이다.

그들이 남긴 글을 보며 유희경 말년의 삶을 유추하면 유희경은 팔십 노인이지만 건장해서 도봉산을 평지 걷듯 했고 벼슬하는 다섯 아들을 둔 덕에 봉양을 받으며 편안한 여생을 누린 듯하다. 그런 그도 죽을 무렵에는 나이 오십 때 매창과 나누었던 뜨거운 사랑을 잊지 못했을 것이다.

서울에서 삼 년 꿈을 꾸었는데, 호남에 다시 봄이 왔다. 황금이 옛 마음을 다시 옮기었으니 한밤중에 홀로 마음 상하네. - 이매창, <자상(自傷)>

매창의 이 시는 여러 가지를 추측하게 한다. 유희경과 헤어지고 병이 들었던 매창이 한양에 올라온 듯 보인다. 한양에 올라온 매창은 유희경이 사는 침류대에 가보지 않았을까? 그곳에서 유희경에게 서울에서 삼 년만 같이 살자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황금이 옛 마음을 다시 옮기었다'는 말은 자신이 경제적으로 궁핍한 상황임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종로구 운니동에 있는 금위영터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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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까지나 기생 신분이었고, 가정이 있는 사내와 당당히 만나기 위해서는 경제적으로 독립해야 했지만 그럴 수 없는 처지니 답답했을 것이다. 유희경의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을 본 여인은 한양은 자신이 있을 곳이 아니란 생각에 발길을 돌렸을 것이다.

한편 돈화문 앞은 조선 후기에 금위영이 있었던 곳이다. 금위영은 조선 후기 오군영(五軍營) 가운데 하나로 훈련도감, 어영청과 함께 국왕 호위와 수도 방어의 핵심 군영이었다. 숙종 때 김석주의 건의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주로 기병으로 편제됐다.

돈화문 앞 비변사 터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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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부시 터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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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화문 앞에는 비변사와 종부시도 있었다. 비변사는 조선 중·후기 의정부를 대신해 국정 전반을 실질적으로 총괄한 최고 관청이었는데 대원군 때 폐지됐다.

대왕대비가 전교하기를, "의정부란 바로 대신들이 백관을 통솔하고 모든 정사를 규찰하는 곳으로서 중요하기가 다른 관서와는 아주 다르다. 서울과 지방의 사무를 전부 비변사로 위임한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사리로 보아 그럴 수 없는 것이 있다.

지난번에 문부(文簿)를 구별하게 한 것도 또한 옛 규례를 회복하자는 데서 나온 것이었다. 지금 의정부가 이미 새로 건축된 이상 이제부터는 정부와 비국도 종부시와 종친부를 합친 전례에 따라 한 관청으로 합치라." - 《고종실록》, 1865년 3월 28일

종부시는 왕실의 계보인 《선원보첩(璿源譜牒)》의 편찬과 종실의 잘못을 규탄하는 임무를 관장하기 위해 설치한 관청이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조선왕조 역대 임금들의 실록(實錄)을 통칭하는 편년체 사서. 태조에서 철종까지 472년간에 걸친 25대 임금들의 실록 28종을 일컫는다. 국왕이 교체될 때마다 사관들이 다양한 자료들을 모아 편찬했다. 1,893권 888책. 필사본·영인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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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관 집필자 소개

《월간축구》, 《골든에이지》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조선의 군주와 역사에 관심이 많아 《월간중앙》과 《한경리쿠르트》 등에 조선 역사의 흥미로운 이야기와 조선 군주의 리더십에 관한 글을 연재한 바..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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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양의 기억을 걷다
서울, 한양의 기억을 걷다 | 저자김용관 | cp명인물과사상사 도서 소개

한양 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안산, 인왕산, 북악산, 낙산, 남산을 시작으로 서울의 성곽, 마을, 강으로 이어지는 한양의 역사를 하나하나 탐색한다. 조선의 왕, 지식인,..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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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길 따라 마음 따라 1. 광나루 2. 잠실나루 3. 뚝섬과 두모포 4. 동작나루와 노들나루 5. 마포 6. 양화나루와 난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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