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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기억을
걷다
대동법에 목숨 건 조선의 경제학자 김육
관련 장소 | 남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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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북서쪽 오늘날 중구 회현동 2가에는 김육(金堉)의 집이 있었다. 김육의 자는 백후(伯厚), 호는 잠곡(潛谷)이다. 중종 때 조광조와 함께 사사당한 기묘명현(己卯名賢) 중 한 사람인 김식이 그의 고조부다. 김식은 기묘사화 당시 성균관 대사성을 지냈으며, 사림의 공론을 주도한 인물로 서울에 세거하며 중앙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화에 연루된 후로 부친 김흥우 때까지 중앙에서 밀려나 은둔한 듯 지내야 했다.
김육의 호가 잠곡인 이유는 1613년에서 1623년까지 경기도 가평 잠곡에서 10년 동안 주경야독을 했기 때문이다. 유년 시절 부친이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고 이어 어머니마저 그의 나이 21세 때 유명을 달리하는 바람에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던 김육은 서울을 떠나 가평 잠곡 청덕동 화개산 아래 굴을 파고는 헛가래를 얽어매놓고 살았다.
은둔한 듯 살았으나 은둔을 목표로 하는 사람이 아니기에 언제든지 빛을 볼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하지만 기다림은 괴로웠다. 남의 밭에 김을 매주고 노역을 마다하지 않았을 정도로 가난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다시 기회를 잡은 것은 서인들이 정권을 잡은 인조반정 이후였다. 마흔넷이란 늦은 나이에 천거를 받아 벼슬을 시작하였고 청요직을 거치면서 효종 대에는 영의정까지 올랐다.
김육은 조선 최고의 개혁 정책이라 불리는 대동법을 추진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대동법은 김육이 처음 주장한 것은 아니다. 1608년(광해군 원년) 이원익과 한백겸의 건의로 경기도에 한정해 실시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지주들의 반발이 워낙 강해 흐지부지됐다. 대동법은 지주들에게 토지세를 물리는 제도다. 그러니 땅을 가지지 않은 소작농들에게는 세금 부담이 없었다.
자연히 기득권 세력들의 극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권문세가들은 악법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1638년(인조 16년) 충청도 관찰사로 발탁된 그는 조정에 대동법과 균역법 시행을 강력하게 건의했지만, 호남·충청 지방의 양반들이 많은 곳인 까닭에 찬성보다는 반대 목소리가 높았다. 그러나 고위직에 있었던 인조 말년과 효종 초에는 대동법 시행을 지상과제로 삼고 강력하게 밀어붙인다.
본인을 쓰시려거든 대동법을 시행하시고 아니면 노망난 재상으로 여기소서! - 《효종실록》, 1649년 11월 5일
임금을 협박한다는 비난도 있었지만 1651년 8월부터 충청도에서 대동법이 본격 시행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함경도를 포함해 전국적으로 확대된 것은 대동법이 처음 거론된 1608년 이후 무려 100년이 지난 뒤인 1708년에 이르러서다. 그나마 김육의 집요한 주장이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김육이 대동법을 이렇게 집요하게 주장한 이유는 불우했던 시절, 경기도 잠곡에서 화전민들과 함께 10년 동안 생활하며 느낀 바가 컸기 때문이다. 서민들의 고단한 삶을 직접 확인한 그는 대동법을 관철하는 것만이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고 민심 이반을 막는 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대동법을 확대 시행하려는 그의 노력은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직접적인 이해관계자인 관료 지주들은 물론 노론의 영수 송시열 등과도 정치적 갈등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이에 굴하지 않았고 죽기 직전 왕에게 올린 글에서조차 호남의 대동법 시행을 강조했다.
1658년(효종 9년) 9월 5일 김육이 죽자 효종은 "어떻게 하면 국사를 담당하여 김육과 같이 확고하여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얻을 수 있겠는가"라며 그의 죽음을 아쉬워했다. 그는 죽었지만 확실한 개혁 정책이었던 대동법의 시행 덕에 김육은 개인적인 영광뿐 아니라 집안의 영화까지 한동안 지속할 수 있게 됐다.
아들 김우명은 현종의 장인이 되었고 손녀는 숙종의 모후가 되었으니 김육이 어린 시절 아버지가 숨을 몰아쉬며 남긴 "집안을 반드시 일으켜 세워라!"라는 유언을 잘 실천한 셈이다. 집안은 다시 예전의 명성을 되찾고 청풍 김씨는 17세기 대표적인 명문가가 되었다.
김육이 회현동으로 들어온 것은 잠곡의 은둔 생활을 청산한 이후로 보인다. 그러나 도성 안에 집을 마련하지 못하고 이사 다니다 효종 원년 영의정에 임명될 무렵에야 남산 아래 집을 구할 수 있었다. 김육은 초가로 지은 공극당(拱極堂), 구루정(傴樓亭) 등 소박한 정자를 좋아했다.
혼자 따로 이은 정자에 앉으니 먼 산이 다 그다지 높지 않네
돌샘은 바람에 요란한데 연잎은 비에 조잘대고
서기가 짧아 책이 지붕에 닿는데 사람은 없어 길이 잡초에 묻혔다네
일 년 내내 홍수와 가뭄 걱정에 작은 마음조차 늙을까 겁이 나네
김육은 이외에도 태극정(太極亭)과 재산루(在山樓)를 세웠는데 특히 재산루는 무예를 연마하는 곳으로 삼고 왕실의 호위병을 훈련시켰다. 이들 중에서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임금의 심복이 될 인재가 나오길 기대했을 것이다. 이 누각의 모습을 묘사한 글에서는 장부의 힘찬 기운이 느껴진다.
재산루는 종남산(終南山) 위의 태극정 아래에 있다. 층진 바위가 솟아 있고 계곡의 물이 그 가운데로 흐르며, 서울을 굽어보며 삼각산을 바라보는 것이 마치 읍(揖)하고 있는 듯 보인다. 지세가 높고 형세가 웅장하며 확 트였는데 그 풍광의 장엄함이 비길 데 없다. 바로 편비(褊裨: 각 군영의 부장)들이 모여서 활을 쏘는 곳이다.
푸른 장송(長松)이 좌우를 감싸고 호위해 있어 마치 장부(丈夫) 십만 명이 꼼짝 않고 서 있는데, 장막(帳幕)은 첩첩이 있고 깃발은 휘날리는 듯한 모습은 바람이 불 때의 풍경이다.
여염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중앙을 겹겹으로 둘러싸고 있어 마치 천 겹으로 은갑 옷을 입은 군사가 진을 치고 있는데, 창칼이 삼엄하게 벌여 있고 전마(戰馬)가 내달리는 듯한 모습은 눈이 온 뒤의 기이한 장관이다.
…… 어찌 이 정자가 유독 산골짜기가 깊고도 그윽한 것, 샘과 못이 깨끗하고도 맑은 것, 기이하고 높은 산봉우리가 삼엄하게 늘어선 것, 사방으로 통하는 큰길이 얽혀 있는 것을 즐겨 한때의 마음과 눈을 시원스럽게 하고자 해서 세운 것이겠는가? 즐겁구나, 이 정자여! 내 장차 너와 더불어 생을 마칠 것이니, 나의 뜻을 아는 자는 오직 무극옹(無極翁: 북송 시대의 도학자 주돈이를 가리킴)일 것이다. - 《잠곡유고(潛谷遺稿)》 제9권 <태극정기(太極亭記)>
잠곡유고(潛谷遺稿)
조선 후기의 문신인 김육(金堉)의 시문집. 11권 9책. 활자본.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조선왕조 역대 임금들의 실록(實錄)을 통칭하는 편년체 사서. 태조에서 철종까지 472년간에 걸친 25대 임금들의 실록 28종을 일컫는다. 국왕이 교체될 때마다 사관들이 다양한 자료들을 모아 편찬했다. 1,893권 888책. 필사본·영인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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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안산, 인왕산, 북악산, 낙산, 남산을 시작으로 서울의 성곽, 마을, 강으로 이어지는 한양의 역사를 하나하나 탐색한다. 조선의 왕, 지식인,..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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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대동법에 목숨 건 조선의 경제학자 김육 – 서울, 한양의 기억을 걷다, 김용관, 인물과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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