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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기억을
걷다
도성의 소방서 금화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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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6년(세종 8년) 2월 한양에 대형 화재가 일어났다. 2월 15일과 2월 16일 이틀 동안 한성부 가옥 2,400여 채가 불에 타 사라져버렸다. 불은 2월 15일 정오 무렵 한성부 남쪽 인순분의 남자 종 장룡의 집에서 시작했다. 마침 서북풍이 세차게 불면서 불은 순식간에 한성부 중부, 북부, 남부 민가로 번져갔고, 이 일대가 눈 깜짝할 사이에 잿더미로 변했다. 거리에는 어린아이와 노인 등 급작스러운 화재에 미처 대피하지 못한 이들의 시체가 즐비하게 쌓였다.
왕은 강원도 횡성에서 사냥하고 있다가 불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환궁을 서둘렀다. 궁궐에 있던 왕비는 즉각 불길을 잡으려 했으나 워낙 불길이 세서 나라의 종묘와 사직을 먼저 지킬 것을 명했다. 다음 날도 민가 약 200여 채가 불탔다.
임금은 궁궐로 돌아오면서 시시각각 도성의 화재 대책을 지시했다. "화재를 당한 사람들에게 집을 지을 재목으로 마른 소나무를 제공하라", "불이 나 식량이 떨어진 사람들에게 묵은 장 300섬을 나눠 주라", "성안의 집들 사이에 불이 막히는 담을 쌓아 불이 옮겨붙지 않도록 하라", "각 부에선 마을마다 큰 우물을 파서 불이 나면 진화할 수 있게 하라"라는 등 대책을 서둘렀다.
이 화재 사건을 계기로 세종은 종루 옆에 금화도감(禁火都監)을 설치했다. 금화도감은 가옥 사이에 방화장(防火墻)을 쌓고, 요소에 우물을 파서 방화 기구를 설치하는 등 방화 업무를 총괄하는 관청으로 관원이 종루 위에 올라가 불이 나는지 경계하고 있다가 연기가 나면 바로 종을 쳐서 알리는 소방서 임무를 수행했다. 그런데 화재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종루에서 종을 칠 때마다 사람들이 깜짝깜짝 놀라자 세종은 화재가 아니면 종을 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불이 난 지 한 달 만인 3월 6일, 방화범 이영생과 장원만 등 일곱 명이 붙잡혔다. 동전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죄로 관청에 재산을 몰수당하자 이에 원한을 품고 화재를 일으킨 것이었다.
조정에서는 1425년(세종 7년) 2월 처음으로 동전인 조선통보를 유통시켰는데, 4월에는 저화 사용을 금지하고 동전만 사용하도록 했다. 따라서 이를 어기면 경제사범이 되었던 셈이다. 특히 죄가 중한 자는 군중이 보는 곳에서 곤장 1백 대를 때리고 수군으로 강제 편입시켰으며, 재산은 관에서 몰수했다. 또 범인을 고발한 자에게는 죄인의 재산 반을 상금으로 주었다.
이 형벌이 너무 과해 한때 방화를 저지르는 자들이 창궐하기도 했다고 한다. 돈에 얽힌 방화 사건으로 조선 시대 소방서 구실을 하게 된 금화도감은 1481년(성종 12년) 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로 격상되었다가 1637년(인조 15년) 3월 8일 혁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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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안산, 인왕산, 북악산, 낙산, 남산을 시작으로 서울의 성곽, 마을, 강으로 이어지는 한양의 역사를 하나하나 탐색한다. 조선의 왕, 지식인,..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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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도성의 소방서 금화도감 – 서울, 한양의 기억을 걷다, 김용관, 인물과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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