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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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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인 1915년 3월 7일 《매일신보》에는 <서대문 205원에 낙찰>이란 기사가 실린다. "6일 낙찰된 새 문 목재만 205원. 입찰자 10명 가운데 경성 염덕기가 205원 50전으로 낙찰. 고고학적으로 보존할 것은 총독부가 영원히 보존한다더라." 이 기사는 돈의문(敦義門)이 해체될 때 나온 것이다. 이해 일제의 도시계획에 따라 철거되어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다만 경희궁 터에서 독립문 쪽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쯤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돈의문은 흔히 서대문으로 불렸다. 도성 정서(正西)쪽 문으로 모화관으로 행차하는 왕과 중국 사신이 왕래하는 문이다. 돈의문과 창의문 사이로는 인왕산 서편 자락이 펼쳐지는데 그곳에 왕의 기(氣)를 일으키는 기운이 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광해군 때는 궁이 두 개나 건설되기도 했다. 그 하나가 인경궁(仁慶宮)이고 다른 하나는 훗날 경희궁(慶熙宮)으로 이름이 바뀐 경덕궁(慶德宮)이다. 경희궁은 영조와 정조 연간 궁궐로 많이 사용됐다.

남쪽에서 바라본 돈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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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거될 무렵의 돈의문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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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경궁은 인왕산 밑에 있었다. 본래는 원종(元宗: 인조의 아버지)의 사저였다. 1616년(광해군 8년) 인왕산 아래가 명당이라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짓기 시작했는데, 공사 도중 새문동(塞門洞: 지금의 종로구 신문로 일대)에 왕기(王氣)가 있다는 말을 듣고 이를 누르기 위해 지은 것이 경덕궁이다. 그 뒤 인조반정으로 공사는 중단되었다가 병자호란 후 청나라의 요구로 홍제원에 역참을 지을 때 궐의 재목과 기와를 사용함으로써 인경궁은 자취를 감추게 됐다.

서대문에서 인왕산으로 이어지는 옛 성곽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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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 아래는 풍수지리상 명당이라는 말에 걸맞게 대대로 잠룡들이 거주하던 지역이다. 인조의 잠저 어의궁(於義宮)이 사직동 부근에 있었고, 영조의 잠저 창의궁(彰義宮)도 이곳에 있었다. 인왕산은 조선이 개국한 뒤 풍수지리상 논란의 대상이 됐던 곳이다. 인왕산을 주산으로 도성이 들어섰다면 이들 궁궐은 모두 정궁이 됐을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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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관 집필자 소개

《월간축구》, 《골든에이지》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조선의 군주와 역사에 관심이 많아 《월간중앙》과 《한경리쿠르트》 등에 조선 역사의 흥미로운 이야기와 조선 군주의 리더십에 관한 글을 연재한 바..펼쳐보기

출처

서울, 한양의 기억을 걷다
서울, 한양의 기억을 걷다 | 저자김용관 | cp명인물과사상사 도서 소개

한양 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안산, 인왕산, 북악산, 낙산, 남산을 시작으로 서울의 성곽, 마을, 강으로 이어지는 한양의 역사를 하나하나 탐색한다. 조선의 왕, 지식인,..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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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잠룡이 머무르는 곳서울, 한양의 기억을 걷다, 김용관, 인물과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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