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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주의 손자인 신광한의 집 기재(企齋)는 후세 문인들이 자주 시로 표현하곤 했는데 특히 계곡(谿谷) 장유(張維)가 좋아했다.

나는 집 이름을 기재라 했다. 우리 집은 동쪽 산이 우뚝 솟아 있는데 그 산을 보려면 발꿈치를 들어 바라보면 되고, 우리 집 서쪽 길이 평평하고 곧은데 그 길을 가려면 발꿈치를 들고 가면 된다.

우리 집 앞에는 하천이 콸콸 흘러내려가는데 물이 흘러가서 쉬지 않는 것을 보면 발꿈치를 들어 감탄하게 된다. 우리 집 뒤쪽에는 소나무가 무성하게 서 있는데 겨울철에도 시들지 않는 것을 보면 발꿈치를 들어 바라보게 된다.

우리 집 가운데 향이 하나 있고 거문고 한 장 있고 책 만 권이 있다. 때때로 향을 태우고 거문고를 연주하며, 때로는 거문고를 던지고 책을 읽으니 그 또한 바라는 바가 있지 않은가? 책에는 현인이 있으니 현인을 보고 바라게 되고, 책에는 성인이 있으니 성인을 보고 바라게 된다.

성인은 하늘과 같은데 하늘과 같게 되면 편안하다. 하늘을 편히 여기고 운명을 삼는 것이 바로 내가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기재 기문(記文)으로 삼는다. - 《기재집(企齋集)》

장유는 월사 이정구, 상촌 신흠, 택당 이식과 함께 조선조 한문(漢文) 4대가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시는 천기(天機)다. 소리로 울리고 색깔과 윤기로 빛나니 그 맑고 흐림과 고상함과 속됨이 자연에서 나온다. 소리와 색깔과 윤기는 사람이 만들 수 있지만 천기의 오묘함은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없다.

장유의 시론이다. 시를 대하는 그의 경건한 자세를 엿볼 수 있다. 장유는 낙산에 지은 안평대군의 새 저택 기공을 축하하는 <인평대군의 새 저택에 대한 상량문(麟坪大君新第上樑文)>을 쓰기도 했다. 그는 이 글에서 노나라의 주공과 위나라의 강숙이 형제 간으로 우애가 깊었음을 들어 같은 꽃받침에 꽃을 피우는 당체(棠棣: 산앵두나무)처럼 형제애가 더욱 깊어지길 기원했다.

집터를 물색하며 거북이에 물어보니 바로 저 낙산 언덕을 점지하였다. 냇물이 반으로 나뉘어 두 갈래로 흐르는 이곳이야말로 평소 낙양(洛陽) 동촌(東村)의 승지(勝地)로 일컬어져 온 곳이다. 금원(창경궁)과 가까워 북극성(임금)의 존엄한 처소를 우러러 볼 수 있어 더욱 좋다.

기공식을 마치고 바로 공인(工人)들이 작업에 착수하였는데, 다시금 듣건대 노위(魯衛)처럼 사뭇 가깝다 하니 당체의 아름다운 정의(情宜)를 더욱 알 수 있겠다. 누각 세우고 연못도 팔 필요 없이 높은 곳은 높고 낮은 곳은 낮게 하여 오직 대나무가 들어차듯 아래를 굳게 하고 소나무 무성하듯 위를 치밀히 손질하여 비가 새고 바람 불 염려만 없게 하였다. 그리고 위엔 왕골기직, 아래는 대자리 깔아 종 치는 소리 듣고 모여들어 와 식사하게 하였다. …… 동쪽과 서쪽으로 마주 향해 서 있는 집, 하늘 위의 삼신(參辰)을 비웃는 듯 보이는데, 형님은 질나발 아우는 피리 불며 인간 세상 깊은 낙 모두 다 누리시라. 양궁(兩宮)의 은총 듬뿍 받아 백 년의 복록 향유하고 후손에 이르도록 아름다운 명성 떨치시라. - 《계곡집(谿谷集)》 제3권

장유는 선조 때 형조판서를 지낸 장운익의 아들로 열두 살 어린 나이에 부모를 모두 여의었다. 불우한 유년시절을 보내면서도 시를 좋아해 땅바닥에 시를 쓰며 놀았다고 한다. 다행히 장가를 잘 가서 청풍계에 살며 병자호란 때 순절한 우의정 김상용의 사위가 된 그는 서인 문인들과의 교류도 잦았다.

머리가 좋아 이십 대 초반 문과에 급제했고, 광해군 시절 예문관·승문원 등에서 관직 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김직재의 옥사에 연루되어 북인들에 의해 축출당하고 난 뒤 인조반정에 가담, 2등 공신에 올랐다. 청요직을 두루 역임하며 대제학까지 지냈으며 성격이 곧아 공신 김류의 전횡을 비판하다 나주목사로 좌천되기도 했다. 평생 국왕을 쫓아냈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겼던 그는 병자호란 이후 최명길이 추천해 우의정에 임명되나 현실에 책임을 지고 끝내 관직에 오르지 않았다. 염치(廉恥)와 도리를 아는 선비란 뜻이다.

생김새도 병신이요, 생각도 어수룩하다. 세상 밖에 노닐면서 양생하며 지낸다오. 하늘이 어쩌면 고달픈 내 삶 측은히 여겨 늙기도 전에 편히 쉬게 고질병 주었는가. 밝은 창 따스한 집에 향불 하나 피워 놓고 아침엔 죽 한 사발, 저녁엔 밥 한 사발. 그럭저럭 사노라니 삼신산(三神山) 도솔천(兜率天)도 다 내 희망과 거리가 멀고 황하(黃河)와 제수(濟水) 흐리든 맑든 접어두기로 하였다오. 염라대왕 부르면 언제거나 가면 될 뿐 오래 살건 빨리 죽건 내 무얼 저어하랴. - <자찬(自讚)>

기재 터는 신대(申臺)라고도 불리며 장유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찾는 명승지였다. 앞서 소개한 인평대군이 살았던 석양루도 이곳에 있었다.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 <제택조(第宅調)>의 기록을 보자. "인평대군 집은 석양루로 불렸다. 기와와 벽 등에 그림이 새겨져 있고 규모가 크고 화려해서 서울 장안에서도 으뜸가는 집이었다. 지금은 장생전(長生殿)이 되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거주하던 이화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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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생전은 궁중의 장례식에 사용할 관을 미리 제작하던 곳이다. 세월이 흐르면 역사의 주인도 바뀌고 집주인도 바뀌는 법, 주인이 바뀌면 집의 쓰임새도 달라지는 법이다. 오늘날 종로구 이화동에 있는 이화장(梨花莊)이 신대가 있던 자리다. 이화장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거주하던 곳으로 현재 그의 유품을 소장하고 있다.

계곡집(溪谷集)
1643년(인조 21년) 간행된 조선 중기의 학자 장유(張維)의 시문집. 36권 18책. 목판본.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
작자·연대 미상의 인문지리서. 조선 시대의 전국과 서울의 지리적·제도적·인문적 사항을 기록한 책이다. 2권 2책. 필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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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관 집필자 소개

《월간축구》, 《골든에이지》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조선의 군주와 역사에 관심이 많아 《월간중앙》과 《한경리쿠르트》 등에 조선 역사의 흥미로운 이야기와 조선 군주의 리더십에 관한 글을 연재한 바..펼쳐보기

출처

서울, 한양의 기억을 걷다
서울, 한양의 기억을 걷다 | 저자김용관 | cp명인물과사상사 도서 소개

한양 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안산, 인왕산, 북악산, 낙산, 남산을 시작으로 서울의 성곽, 마을, 강으로 이어지는 한양의 역사를 하나하나 탐색한다. 조선의 왕, 지식인,..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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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길 따라 마음 따라 1. 광나루 2. 잠실나루 3. 뚝섬과 두모포 4. 동작나루와 노들나루 5. 마포 6. 양화나루와 난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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