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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기억을
걷다
불길한 운명을 타고난 남소문
관련 장소 | 광희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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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소문(南小門)의 흔적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남산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주민도 모른다. 남산 산책로 혹은 성곽 길을 열심히 오르내리던 사람들에게 "남소문을 아세요?"라고 물으면 고개를 흔든다. 좀 아는 사람은 "응, 그거 광희문이야"라고 답을 한다. 나도 남소문의 위치를 알기 위해 여러 번 발걸음을 해야 했다.
옛날 사람들도 남소문의 위치를 궁금해했다. 사람들은 남산 봉수대 동쪽 성문을 광희문으로 오인했지만 그 문은 따로 존재했다. 실록에도 남소문과 광희문을 구별하지 못하는 신하들의 말이 기록돼 있다.
늙은이를 불러 물어보니 어느 곳은 문 터이고 어느 곳은 군보(軍堡) 터라 하였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살펴보면 동남에 광희문이 있다 하였는데 이것이 남소문의 이름인 듯합니다. - 《숙종실록》, 1690년 7월 19일
남소문은 처음부터 기구한 운명을 안고 태어났다. 처음에는 도성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 즉 남산골 사람들의 통행을 위해 만들어진 작은 문이었다. 그런데 그 문이 만들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가 죽자 풍수가들은 음양설을 거론하며 "손방(巽方, 동남쪽)은 왕가의 황천문(皇天門)이다"라는 불길한 말들을 퍼트렸다. 결국 남소문은 지어진 지 12년 만인 1469년(예종 1년) 굳게 닫히고 이후 다시는 열리지 않았다. 그러다 언제 사라졌는지 모르게 사라졌다.
예전에는 남소문이 있었다. 광희문 남쪽, 목멱산 봉대 동쪽에 있었는데, 김안로가 제멋대로 닫았다고 하니, 근거할 바가 없다. 숙종 5년(1679년)에 다시 설치하자고 의논하다가 곧바로 중단되었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국여지비고> 제1권 <경도> 편
숙종 대 남소문 개통을 찬성하던 김석주는 1679년(숙종 5년) 상소문에서 입장을 바꾸어 "남소문이 옛날에는 있었는데 지금은 폐지되고 없습니다. 풍수가의 말에 의하면 소양(少陽)을 열어야 함에도 지금 이를 열지 않고 있으므로 왕가 자손을 보는 국가의 경사에서 매양 여자들이 많고 남자들은 적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옛터를 찾아서 문을 열어 이로써 소양의 기운이 통할 수 있게 된다면 응당 좋은 일이 있게 될 것이라고 하나 이는 부당합니다"라며 남소문 개통에 반대했다. 이후에도 남소문은 흉한 문이란 생각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대개 남소문을 폐지한 것은 어느 때부터인지 모르겠으나, 중간에 사람들이 말하길 "삼화방을 열면 남인이 더욱 창성할 것이다" 하니, 이 때문에 기미년에 허적 등이 의논하여 다시 열려 하였으나 김석주에게 저지당하였다. 지금에 이르러 사람들이 반드시 다시 열려 하였으나, 임금이 급하게 여기지 않으므로 마침내 수행하지 못하였다. - 《숙종실록》, 1690년 8월 10일
오늘날 중구 장충동 장충단 공원에서 국립극장 길로 올라가면 한남동으로 통하는 고개가 보인다. 그 고개 왼편에 남소문 터라는 표석이 있다. 남소문동이란 지명이 생긴 것으로 봐서 그 부근에 남소문이 있었던 듯하다. 그 표석 하나 찾는데도 여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곳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새겨져 있다. '서울의 소문으로 세조 때 세워져 1469년(예종 원년) 음양설에 따라 철거, 그 후 일본강점기에 주초마저 없어지게 되었다.'
1969년 7월 5일 장충동 신라호텔 영빈관 정문 오른쪽 비탈에서는 순종의 친필이 새겨진 장충단비(裝忠壇碑)가 발견됐다. 장충단은 1900년 명성황후가 시해당한 뒤 순사한 궁내부 대신 이경직과 시위대장 홍계훈 등 문무 열사들의 영령을 모시기 위해 남소영(南小營)에 건립한 제단이다. 그곳에 이 비를 세우고 매년 봄과 가을 제사를 지냈다. 경술국치(庚戌國恥)를 전후하여 애창된 <한양가(漢陽歌)>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어 당시 상황을 증언해준다.
남산 밑에 지은 장충단 저 집 나라 위해 몸 바친 신령 모시네. 태산 같은 의리에 목숨 보기를 터럭같이 하도다. 장한 그분.
한편 이곳 남소문골에서 귀신을 만난 이야기도 전해진다.
어느 날 한 남자가 준마를 타고 화려한 옷을 입고 밤을 틈타 남소문을 지나는데, 어귀에서 아름다운 여인이 손짓하여 부르므로 말에서 내려 따라가니 집이 깊숙한 외진 곳에 있었다. 그 집에 이르니 이미 어두웠는데, 여인은 남자와 마주 앉자 홀연히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남자가 그 까닭을 물었다.
여인은 귓속말로 말하기를 '공의 풍채를 보니 필시 보통 사람이 아닌데 나 때문에 억울하게 죽게 되었습니다' 한다. 남자가 놀라서 자세히 말해보라 했다. 여인이 이내 말하기를, '도적이 나를 미끼로 사람들을 유인하여 죽이고는 옷과 말과 안장을 나누어 가진 지가 1년이 넘었습니다. 내가 매일 탈출하려고 생각해왔으나 도둑의 일당이 몹시 많아서 잡혀서 죽을까 두려워 못하고 있었습니다. 공은 나를 살릴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공이 즉시 칼을 빼어 들고서 잠을 자지 않고 있었는데, 한밤중이 되자 방의 윗쪽 다락에서 여인을 부르는 소리가 나면서 큰 밧줄이 내려왔다. 공은 몸을 솟구쳐 벽을 차 무너뜨리고 급히 여자를 업고 담을 뛰어넘고는 여인이 붙잡는 옷자락을 잘라 버리고 달려갔다. 이튿날 벼슬을 사직하고 선산(善山)으로 돌아와서 기절을 꺾고 학문에 종사하였다. 자리 옆에 항상 옷자락을 두고서 자제들에게 경계를 삼도록 하였다. - 《기재잡기(寄齋雜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8권에 수록된 야사다. 이 이야기 주인공이 바로 박영(양녕대군의 외손자)이다. 그의 후손들은 옷자락이 잘린 두루마기를 대대로 유물로 전해 받고 있다고 한다. 후손들은 그 두루마기를 보며 무슨 교훈을 얻었을까? '여자가 예쁘다고 따라가지 말라!' 즉 여색을 조심하란 충고일 것이다. 박영이 만난 그 여인은 남소문골에서 살던 귀신인 셈이다. 그만큼 이 고개는 귀기 서린 곳이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조선왕조 역대 임금들의 실록(實錄)을 통칭하는 편년체 사서. 태조에서 철종까지 472년간에 걸친 25대 임금들의 실록 28종을 일컫는다. 국왕이 교체될 때마다 사관들이 다양한 자료들을 모아 편찬했다. 1,893권 888책. 필사본·영인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
조선 시대의 인문지리서(人文地理書). 세종의 명으로 맹사성(孟思誠), 신장(申檣) 등이 썼다. 55권 25책. 목판본.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
작자·연대 미상의 인문지리서. 조선 시대의 전국과 서울의 지리적·제도적·인문적 사항을 기록한 책이다. 2권 2책. 필사본.
국역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긍익(李肯翊)이 쓴 조선 시대의 야사총서(野史叢書). 59권 42책. 필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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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안산, 인왕산, 북악산, 낙산, 남산을 시작으로 서울의 성곽, 마을, 강으로 이어지는 한양의 역사를 하나하나 탐색한다. 조선의 왕, 지식인,..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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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불길한 운명을 타고난 남소문 – 서울, 한양의 기억을 걷다, 김용관, 인물과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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