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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기억을
걷다
안평대군의 한이 서린 곳
관련 장소 | 인왕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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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4월, 옥인아파트를 철거하던 서울시는 기린교로 추정되는 다리를 발견하고 주변 지역을 서울시 기념물로 지정했다. 그리고 이곳을 안평대군이 살던 당시 모습처럼 가꾸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물소리 요란하다고 해서 수성동이라 불리던 그곳은 현재 물이 말라 아쉽다.
인왕산 기슭, 넓은 골짜기 깊숙한 곳에 있으니 바로 비해당(안평대군의 호)의 옛 집터다. 시내가 흐르고 바위가 있는 경치 좋은 곳이 있어서 여름철에 노닐며 구경할 만하다. 다리가 있는데 기린교라 한다.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인왕산 서편 수성동이 이상 세계를 꿈꾼 예술가 안평대군의 공간이었다면 인왕산 동편 무계동(武溪洞)은 안평대군의 정치적 야망이 꿈틀거렸던 공간이다. 창의문을 지나 세검정 쪽으로 가다 왼편 부암동 동사무소 골목을 올라가다 보면 안평대군이 머무르던 무계정사(武溪精舍) 터가 나온다. 하지만 막상 찾아가 보면 기대와는 달리 그냥 근대소설가로 유명한 현진건의 집터, 아니 그 폐허라고 명명함이 옳을 듯하다.
안평대군은 이곳에서 여러 문사들과 교유했다. 그러나 '방룡소흥(旁龍所興: 장자가 아닌 왕자가 왕위를 잇는다)'의 땅에 지어졌다는 이유로 무계정사는 곧 철거됐으며 안평대군도 강화도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래서 이곳에는 안평대군 흔적이 남아 있다. 무계정사는 또한 꿈속에서 본 무릉도원을 모델로 지은 집이기도 하다. 안견(安堅)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에는 안견이 이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인 안평대군의 꿈 이야기가 자세히 서술돼 있다.
바야흐로 정신이 아른거리고 잠이 깊이 들어 꿈도 꾸게 되었다. 꿈에 박팽년과 함께 봉우리가 우뚝한 산 아래를 거닐다 수십 그루 복사꽃이 흐드러진 오솔길로 들어섰다. 여러 갈래 길이 있어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는데 어떤 사람이 나타나 "이 길을 따라 북쪽으로 꺾어져 골짜기에 들어가면 무릉도원입니다"라고 알려주었다.
말을 채찍질하며 가니, 산벼랑이 울뚝불뚝하고 나무숲이 빽빽하며 시냇물은 돌고 돌아서 거의 백 굽이로 휘어져 사람을 홀리게 하였다. 그리고 그 골짜기를 돌아가니 넓은 마을이 나타났다. 2, 3리쯤 될 듯한데 사방 벽이 바람벽처럼 치솟고, 구름과 안개가 자욱한데 멀고 가까운 도화 숲이 어리비치어 붉은 놀이 떠오른다. 또 대나무 숲과 초가집이 있는데 싸리문은 반쯤 닫히고 토담은 이미 무너졌으며 닭과 개와 소와 말은 없고, 앞 시내에 오직 조각배가 있어 물결을 따라 오락가락하니, 정경이 소슬하여 그곳이 무릉도원이었다. 이에 나는 곁에 있던 박팽년에게 "여기가 바로 도원동이구나"라고 감탄하고 산을 내려오다 꿈에서 깨어났다.
나는 정묘년(1447년) 4월 무릉도원 꿈을 꾼 일이 있었는데 지난해 9월 우연히 유람하던 중 국화꽃이 물에 떠내려오는 것을 보고 칡넝쿨과 바위를 잡아 올라오니 비로소 이 아름다운 곳을 얻게 되었다. 이에 꿈에서 본 것과 비교해보니 초목이 들쭉날쭉한 모양과 샘물과 시내의 그윽한 형태가 거의 비슷했다. 그래서 올해 들어 두어 칸을 짓고 무릉계(武陵溪)란 뜻을 취해 '무계정사(武溪精舍)'라는 편액을 걸었다.
안평대군이 꾼 봄날의 꿈은 무계정사란 건축물로 나타났고, 안견은 <몽유도원도>를 그렸다. 안평대군은 그림과 글씨, 가야금 등 예술 방면에는 못하는 것이 없는, 예인(藝人) 기질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안평대군의 글씨가 얼마나 뛰어났는지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명나라 사신이며 학자인 예겸이 조선에 왔다가 신숙주(申叔舟)의 책 표지에 쓰인 범옹(泛翁)이란 글씨를 보고 "필법이 아주 신묘한데 누가 쓴 것입니까?"라고 물었다. 신숙주는 글자의 주인인 안평대군이 강화도에서 사약을 받고 죽은 후였기 때문에 사실대로 말하지 못하고 강희안의 글씨라고 둘러댔다. 예겸이 강희안의 글씨를 얻기를 간곡하게 청하자 신숙주는 하는 수 없이 강희안에게 몇 글자 써달라고 부탁했는데, 예겸은 중국으로 돌아가면서 그 글을 보고 "같은 사람의 글씨가 아닙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놀라운 감식력을 보여준 일화다. 안평대군의 글씨는 중국에도 널리 알려져 명나라 황제가 그의 글씨를 보고 "매우 좋다. 이것이 조맹부 글씨다"라는 칭찬을 했다고 한다.
안평대군의 후원으로 많은 예술 작품을 탄생시킨 안견은 당시나 지금이나 여전히 신비에 싸인 인물이다. 충남 서산 출신인 그는 출생 시기나 사망 시기, 화가가 된 배경이나 누구에게 수업을 받았는지가 전혀 밝혀지지 않았다. 신숙주는 그를 평하길 "천성이 총민하고 정박(精博)하며 고화(古畵)를 많이 열람하여 그 요령을 다 터득하고 여러 사람의 장점을 모두 모아 절충하여 통하지 않는 것이 없으나, 비해당 안평대군과 교류한 지 오래되었다"라고 하였다.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몽롱한 꿈속 풍경을 세밀한 붓질로 묘사해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하며 꿈과 현실 세계를 그림 한 폭에 동시에 나타낸 이 그림은 아쉽게도 현재 일본 덴리대학 소유다.
세종과 문종 연간에는 화원에게 5품 이상 품계를 주지 않는 것이 관례였으나 안견은 안평대군의 후원으로 정4품까지 승진한다. 하지만 안견은 어느 날 홀연히 자취를 감춰버린다. 이후 《성종실록》 1479년 1월 8일 기사에 안견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안소희(安紹禧)는 바로 화공 안견의 아들이니, 감찰(監察)이 될 수 없습니다"라는 기사다. 과거에 합격했는데 왜 안 된다고 하느냐고 임금이 묻자 "화공의 아들이 어찌 감찰이 될 수 있습니까?"라고 말했고, 임금은 그럼 다른 사람으로 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 이후 실록에는 안견에 대한 어떤 기록도 발견되지 않는다. 야사에는 안견이 장차 안평대군에게 일어날 화(禍)를 예견하고 어느 날 일부러 안평대군의 붓통을 훔치다 발각돼 서로 발길을 끊어버렸다는 확실치 않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안평대군이 살던 무계정사에는 세월이 한참 흐른 뒤 근대문학의 기수이자 소설 《빈처》를 쓴 소설가 현진건이 살았다. 현진건은 《동아일보》 사회부장 재직 중 손기정 선수 일장기말소사건으로 6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기자직에서 해직됐다. 직장을 잃은 그는 가족 생계를 위해 관훈동에서 이곳 부암동 무계정사 터로 이사를 오게 된 것이다. 현진건은 양계장을 차려 호구지책을 도모하였지만 울분 때문인지 밥보다 술을 더 자주 찾았다. 결국 현진건은 이곳 부암동에서 불우한 날을 보내다 생활고가 겹쳐 제기동으로 이사한 뒤 그곳에서 장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안평대군의 정치적 구상이 좌절되고 그의 일장춘몽이 깨진 뒤 그 불행한 기운이 소설가에게 옮겨간 것일까? 이곳 무계정사 터는 현진건이 떠난 뒤 폐가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
조선 시대의 인문지리서(人文地理書). 세종의 명으로 맹사성(孟思誠), 신장(申檣) 등이 썼다. 55권 25책. 목판본.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조선왕조 역대 임금들의 실록(實錄)을 통칭하는 편년체 사서. 태조에서 철종까지 472년간에 걸친 25대 임금들의 실록 28종을 일컫는다. 국왕이 교체될 때마다 사관들이 다양한 자료들을 모아 편찬했다. 1,893권 888책. 필사본·영인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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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안산, 인왕산, 북악산, 낙산, 남산을 시작으로 서울의 성곽, 마을, 강으로 이어지는 한양의 역사를 하나하나 탐색한다. 조선의 왕, 지식인,..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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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안평대군의 한이 서린 곳 – 서울, 한양의 기억을 걷다, 김용관, 인물과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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