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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기억을
걷다
을지로에 살았던 조선 최고의 역관
관련 장소 | 을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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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는 조선 시대부터 동현(銅峴) 혹은 구리개(仇里介)로 불리던 고개였다. 이곳은 약방이 즐비했다고 한다. 외환은행 본점 부근에는 혜민서(惠民署)가 있었다. 혜민서에는 약방 기생들이 있어 진맥을 보았다고 한다. 조선의 궁중음악을 담당하던 기관인 장악원(掌樂院)도 혜민서 옆에 있었다.
조선 시대 을지로가 구리개로 불린 이유는 황토로 이뤄진 이 고개의 땅이 몹시 질어서 먼 곳에서 보면 마치 구리가 햇볕을 받아 반짝이는 것처럼 구릿빛이 나서라고 한다. 또 《한경지략》에는 "동현을 보통 구리개라고 한다. 보은단동과 마주하는 마을이며, 또 구름재라고도 한다. 구리와 구름이 발음이 비슷해 그런 까닭이다"라고 했다. 이름은 부르는 사람 마음이니 원래는 구리개였던 것이 구름재로 변했고, 이를 한자명으로 음역하여 운현(雲峴)이라고도 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동현과 뜻이 통하는 황금정(黃金町)이라 고치고 을지로를 황금정통이라 했다. 가게와 상가가 즐비해서 그런 이름을 붙인 듯하다. 이곳이 이렇게 온갖 상점들이 즐비하게 들어선 이유로는 나라에서 만든 시장이 아니라 민간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생긴 시장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이 주변에 역관들이 많이 거주했기 때문에 그들이 가져온 외래 문물들을 상인들이 사고팔면서 자연스레 상점들이 들어설 수 있었다.
조선 시대 최고의 역관은 선조 때 인물인 홍순언이다. 그는 지금으로 치면 을지로1가 180번지 부근에 살았다고 하는데, 보은단동(報恩緞洞)이란 지명이 그에 관한 일화에서 유래되었다. 어느 날 홍순언이 명나라 북경(北京)에 가는 길에 기생집에 들르게 되었다. 그곳에서 한 기생을 만났는데 사정을 듣고 보니 딱했다. 부모의 장례 비용을 치르기 위해 기생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정을 들은 홍순원은 그 여인이 다시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도록 도와줬다.
몇 해 후 다시 북경에 가니 여인은 명나라 병부상서인 석성의 부인이 되어 있었다. 여인은 은혜를 갚기 위해 보은단(報恩緞)이라 손수 수놓은 비단 수십 필을 홍순원의 집으로 보내왔다. 그래서 이 지역 이름이 보은단골, 한자명으로 보은단동이 되었다.
정조 시대 최고의 재상으로 꼽히던 채제공도 한때 보은단동에 살았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집 이름을 매일 선을 행한다고 해서 매선당(每善堂)이라 지었다. 채제공은 이 집에서 살 때가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고 한다. "내가 그때 일을 말하려고 하면 먼저 눈물이 앞을 가린다." 1780년 홍국영이 역모죄로 물러나자 채제공은 홍국영과 친했다는 이유로 각종 탄핵을 받았고 근거 없는 헛소문도 많이 돌았다. 정조는 8년 동안 채제공을 기용하지 않았다. 채제공에게는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을 것이다. 채제공은 매일 스스로 다스린다는 뜻에서 매선당이라는 당호(堂號)를 지었다.
내가 번암 상공 댁을 방문하고 당(堂)에 걸려 있는 액자를 가리키며 "매선(每善)이라는 말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하고 물었다. 상공은 서글프게 얼굴빛을 바꾸며 말하기를 "이것은 우리 아버님께서 남겨주신 뜻일세.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임종하실 때 내 손을 잡으며 매사에 선을 다하라고 하신 뒤 돌아가셨으니, 아, 내가 어찌 감히 잊겠는가. 그래서 항상 이 액자를 보면서 마음을 가다듬고 있다네" 하였다. - 《다산시문집》 제13권 <매선당기(每善堂記)>
채제공은 젊은 시절 홍성에서 살았다. 홍성 집은 그의 조부 채성윤이 마련해준 집이다. 홍성에서 성장한 채제공이 오늘날 중구 만리동에 있던 고개인 약고개(약현, 藥峴)와 인연을 맺은 것은 스승 오광운 덕분이다. 오광운의 호 약산(藥山)이 바로 약고개를 가리킨다. 오광운의 집은 삼우당이라 했는데 채제공은 스승 오광운이 세상을 떠나자 "삼우당 앞의 소나무 위에 흐드러지게 걸린 달, 책상에 앉아 있는 그 사람 다시 볼 수 없구나"라고 탄식했다.
《동국여지비고》에 채제공이 살던 약현의 집 소개가 나와 있다. 원래는 《용재총화》를 쓴 성현의 집으로 약전현(藥田峴)에 있었는데 언덕을 뒤에 두고 집을 지었다고 한다. 개국 초에 무학대사가 터를 잡아서 성씨 집안에 주었다.
그 후 2백여 년이 흐르는 동안 집을 지키지 못하다가 뒤에 오광운의 집이 되었다. 오광운은 그것을 다시 제자 채제공에게 넘긴 것이다. 1751년 정월, 채제공이 부친을 뵙기 위해 안동 근처 병산에 가 있는데 약산에 있던 아내가 숨을 거두었다. 그는 부인이 죽었다는 황망한 소식을 듣고 비탄에 잠겨 시를 남겼다.
서울로 다시 간들 무엇하랴? 다시 만날 수도 없는 것을. 함께 은거하자 한 말이 한스럽구나. 도성의 봄은 바라보면 어지러울 터. 빈집에 밤 더딘 것 원망하였겠지. 이별할 때 처량하게 하던 말.
병석에 누운 부인은 또 남편을 기다리며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한경지략(漢京識略)
조선 시대 한성(漢城)의 역사를 간략하게 서술한 책. 연대는 미상이며, 저자는 유득공의 아들 유본예로 추정되는 수헌거사(樹軒居士)다. 2권 2책. 필사본.
국역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시와 산문집.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
작자·연대 미상의 인문지리서. 조선 시대의 전국과 서울의 지리적·제도적·인문적 사항을 기록한 책이다. 2권 2책. 필사본.
용재총화(齋叢話)
조선 전기의 학자인 성현(成俔)의 수필집. 3권 3책. 활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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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안산, 인왕산, 북악산, 낙산, 남산을 시작으로 서울의 성곽, 마을, 강으로 이어지는 한양의 역사를 하나하나 탐색한다. 조선의 왕, 지식인,..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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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을지로에 살았던 조선 최고의 역관 – 서울, 한양의 기억을 걷다, 김용관, 인물과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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