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의 기억을
걷다
도성의 하수도 광희문
관련 장소 | 광희문 |
---|
광희문(光熙門)은 중구 광희동에 있는 조선 시대의 성문이다. 수구문(水口門) 또는 시구문(屍口門)이라고도 한다. 1396년(태조 5년)에 도성을 쌓을 때 창건되었고, 1711년(숙종 37년)에 고쳐 쌓았다. 1719년에는 석축 위에 문루를 짓고 현판을 걸었다. "못된 바람은 수구문으로 분다"라는 말도 있듯, 이 문은 주로 도성에서 죽은 사람들의 시체가 나가는 문이었다.
도성의 모든 하수 모여드는 곳, 조그만 바위 구멍 광희문이네. 사람의 혈맥 같은 수많은 개천 밤낮으로 이곳을 새어나가고 똥오줌이 바다로 빠져나가니 인분 실은 우마차 꼬리를 무네. 천연으론 본디가 펀펀하던 곳, 어찌하여 패고 언덕이 졌나. 겹쌓여 옴딱지가 떨어져 나오고 덩이덩이 떡 만두 널려 있는데, 가끔 나무에도 걸려 있어 고약한 비린내가 물씬 풍기네. - 《다산시문집》 1권, <동성음(東城吟)>
광희문 부근 한양 풍경을 묘사한 정약용의 시다. 광희문 밖은 공동묘지가 있었고 문으로는 시체가 나갔으며 그 아래로는 한양의 똥오줌이 빠져나갔다. 또한 박세당의 문집인 《서계집(西溪集)》 4권에는 이런 글이 있다.
수구문 밖에 다리가 있고 곁에 '영도교'라는 작은 빗돌이 있다. 대개 동망산(東邙山)과 서망산(西邙山) 두 산이 있는데, 동망산은 성도(盛都)의 장례를 위한 것이다. 그래서 동망산으로 가는 상여는 모두 수구문을 경유하여 이 다리를 지나서 가므로 이렇게 이름 붙인 것이다. 근래에 어느 고관이 건너가다가 상서롭지 못하다고 여겨 빗돌을 무너뜨리고 갔다고 한다. 류성룡은 이때 심상을 시로 읊었다.
"목숨을 아무리 아낀데도 불로장생은 못할 터이고 죽음을 꺼린데도 한 번 죽음이 오지 않을까보냐. 영도교 옆의 들꽃 길이여, 작은 빗돌 없어진 뒤 돌아올 이 몇 명일까?"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다리'라는 영도교(永渡橋)는 종로구 숭인동과 중구 황학동 사이 청계천에 있던 다리로 흥인지문(동대문)을 거쳐 왕십리, 뚝섬, 광나루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건너야 하는 다리였다. 1458년(세조 4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된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고 강원도 영월로 귀양갈 때 건넜던 다리기도 하다. 영도교에 대해서는 광나루 편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하자.
국역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시와 산문집.
서계집(西溪集)
조선 후기의 학자인 박세당(朴世堂)의 시문집. 20권 10책. 목판본.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글
출처
한양 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안산, 인왕산, 북악산, 낙산, 남산을 시작으로 서울의 성곽, 마을, 강으로 이어지는 한양의 역사를 하나하나 탐색한다. 조선의 왕, 지식인,..펼쳐보기
전체목차
백과사전 본문 인쇄하기 레이어
[Daum백과] 도성의 하수도 광희문 – 서울, 한양의 기억을 걷다, 김용관, 인물과사상사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