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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 한양
의 기억을
걷다

정월 대보름 수표교 다리밟기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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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장소 청계천

백 년 전 청계천 주변 풍경을 상상할 수 있는 글이 있다. 구한말 왕실과 관청에 그릇을 납품하는 공인이었던 지규식이 쓴 《하재일기(荷齋日記)》다. 다음은 1891년 1월 15일자 일기다.

정권과 함께 옷을 걸쳐 입고 대문 밖으로 나가 수표교에 이르러 달빛과 등불 빛 야경을 구경하고 돌아오다 청계천시장 앞에 이르니, 달빛과 등불 빛이 서로 어우러져 비치는 속에서 북과 꽹과리를 치며 귀가 따갑도록 노래를 부르고 소리를 지르며, 장안의 청춘 남녀들이 어지럽게 떠들어대는데 구경할 것이 못 되었다. 그래서 즉시 숙소로 돌아오니 대략 삼경쯤 되었다. 정권은 돌아가고 창순은 잠이 들어 나 홀로 무료히 앉아서 절구 한 수를 읊조렸다.

정월이라 대보름 달빛이 밝은데
향내 짙은 청춘 남녀 길을 메우네.
문을 나서 홍교(虹橋)를 거닐었지만
정담을 나눌 사람 하나도 없구나.

읊기를 마치니, 갑자기 담장 너머에서 낭랑하게 웃으며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귀를 기울여 들어보니, 낭자 두서너 명이 〈아랑(阿郞)〉이란 신곡(新曲)을 겨루어 부르고서 서로 희학질(실없는 말로 농지거리를 하는 짓)을 하고 있었다. 또 들으니 서쪽 담장 아래에서 한 노파가 크게 취하여 흐느껴 울면서 "이 몸도 젊었을 때는 해마다 이 밤이 되면 달빛을 구경하고, 예닐곱 명이 짝을 지어 장안의 번화가를 누비며 한없이 즐거워했지. 그때는 역시 진기한 구경거리와 좋은 일들이 많았다네. 어찌하겠는가? 세월은 유수와 같아 귀밑머리가 흰 눈처럼 백발이 되었으니 세상일이 한스럽구나"라고 하면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울기도 하다가 또다시 깔깔거리고 크게 웃는데, 그 거동이 눈으로 보는 것처럼 선하였다. 나도 혼자 앉아 한바탕 웃고서 다시 절구 한 수를 읊었다.

춘정 그리는 아가씨들 아랑(阿郞)을 창(唱)하고
술에 취한 늙은 노파 정신을 못 차리네.
오늘 밤 저 달빛은 치우침이 없건마는
부질없이 동벽서상(東壁西廂)에서 애를 끊누나!
대략 사경쯤 되어서 다시 잠을 잤다.

정월 대보름을 맞아 수표교에서는 다리밟기가 한창인데 글쓴이는 그릇 만드는 장인인지라 여관에서 무료하게 밤을 보내고 있다. 대보름인데다가 인파가 몰리는 수표교 다리 옆 여관이니 조용할 리 없다. 젊은 처자들의 희학질 소리에 귀 기울여보기도 하고, 여관 옆에서 술 취한 노파가 지나간 젊음을 한탄하며 부르는 노랫가락에 웃음을 터트리기도 한다. 화려한 수표교 풍경과 글쓴이의 적적한 마음이 잘 대비되는 글이다.

국역 하재일기(荷齋日記)
구한말 왕실과 관청에 그릇을 납품하던 공인(工人)인 지규식(池圭植)이 쓴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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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관 집필자 소개

《월간축구》, 《골든에이지》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조선의 군주와 역사에 관심이 많아 《월간중앙》과 《한경리쿠르트》 등에 조선 역사의 흥미로운 이야기와 조선 군주의 리더십에 관한 글을 연재한 바..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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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양의 기억을 걷다
서울, 한양의 기억을 걷다 | 저자김용관 | cp명인물과사상사 도서 소개

한양 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안산, 인왕산, 북악산, 낙산, 남산을 시작으로 서울의 성곽, 마을, 강으로 이어지는 한양의 역사를 하나하나 탐색한다. 조선의 왕, 지식인,..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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