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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
안국동의 두 왕비와 재동의 백송
관련 장소 | 북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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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국동은 북쪽으로는 화동, 동쪽으로는 재동, 남쪽으로는 종로1·2가동, 서쪽으로는 송현동과 접해 있는 지역으로 조선 시대에는 안국방(安國坊)이라 불렸다. 감고당(感古堂)은 안국방에 있던 집인데 인현왕후(숙종의 계비)의 부친인 민유중이 살던 집이다. 인현왕후가 폐서인이 되어 물러났을 때 이곳에서 살았다.
임금(영조)이 안국동의 인현왕후가 왕비의 자리에서 밀려났을 때의 사제(私第)에 나가 "내가 지난해에 인현 왕후의 수필을 받아 열람하고서 다시 6년 동안 거처하신 침실을 보니, 거의 유감이 없다"라고 말했다. 또한 침실을 감고당(感古堂)이라 이름 짓고 어필로 그 편액을 썼다.
"내가 태어난 것이 마침 갑술년(1694년)이었는데, 바로 왕후께서 복위되던 해다. 이 때문에 오늘날까지 일단의 부류들(노론)이 나에 대해 기뻐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 - <영조실록>, 1761년 6월 13일
1761년 6월 13일 영조가 감고당을 방문하고는 감회에 젖어 직접 편액을 써서 걸게 했다는 기록이다. 자신의 탄생이 노론 부활로 이어졌다는 평가도 곁들였다. 손자 정조도 이곳을 소홀히하지 않았다. 정조는 1799년(정조 23년) 8월 14일 감고당에 승지를 보내 다음 날 인현왕후 제사를 지내주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감고당은 구한말 고종의 아내이자 조선의 마지막 국모인 명성황후가 대궐에 들어가기 전까지 살던 사택이기도 하다. 조선의 국모를 두 명이나 배출했으니 역사적인 곳이라 하겠다.
감고당길 위로는 재동(齋洞)이 나온다. 1453년 10월 10일 수양대군이 계유정란을 일으켜 김종서, 황보인 등을 무참히 살해할 당시 이 동네는 피비린내가 진동했다고 한다. 이곳에는 천연기념물 제8호로 지정된 수령 600년이 된 백송이 서 있다. 높이 17미터에 너비 3.82미터인 재동의 백송은 그날 처참한 살육의 현장을 혼자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날 밤 수양대군의 명령을 받은 군사들은 살생부 명단에 들어 있던 김종서의 측근들을 모두 살해했다. 어둠 속에서 피가 튀고 유난히 하얀 재동 백송만이 홀로 빛났다. 계유정란 당시 마을 곳곳에는 목 달아난 시체들이 뒹굴었고 거리도 핏빛으로 물들었다고 한다. 어찌나 참혹했던지 마을 사람들이 집에 있던 회(灰: 재)를 가지고 나와 길에 덮을 정도였다. 재를 덮은 이 마을은 잿골(회동, 灰洞)이라 불렸고, 이것을 한자명으로 재동(齋洞)이라 표기한 것이 오늘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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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안산, 인왕산, 북악산, 낙산, 남산을 시작으로 서울의 성곽, 마을, 강으로 이어지는 한양의 역사를 하나하나 탐색한다. 조선의 왕, 지식인,..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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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안국동의 두 왕비와 재동의 백송 – 서울, 한양의 기억을 걷다, 김용관, 인물과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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