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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인들을 위한 관청 명통시
관련 장소 | 청계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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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희전 주변 하마비 건너편에는 명통시(明通寺)라는 곳이 있어 장님들이 자주 모였다. 명통(明通)은 밝음, 즉 눈이 밝게 뜨이는 것을 의미하니 맹인들은 이곳에서 앞 못 보는 고통을 달랬을 듯하다. 성현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 있다.
도시 복판에 명통시가 있었는데, 장님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장님들은 초하루와 보름에 한 번씩 모여 경문(經文)을 외며 축수(祝壽)하는 것을 일삼았는데, 그중에 높은 사람은 당(堂)으로 들어가고 낮은 사람은 문을 지키면서 겹문에 창(戟)을 세워 놓으므로 사람이 마음대로 들어가지 못한다.
명통시에 대한 다른 기록을 살펴보면 이렇다.
지금 도성 안의 남쪽, 영희전은 역대 임금 영정을 봉안한 궁이다. 그 뒷골목 하마비의 건너편에 이른바 맹청(盲廳)이라는 것이 있으니, 이것이 바로 옛날 명통시가 아닌가 싶다. …… 임금이 능침(陵寢)을 알현하기 위해 거둥할 때에는 어가가 궁궐 밖으로 나갈 때나 돌아올 때에 여러 맹인이 으레 도포를 입고 떼를 지어 성 밖으로 나가 어가를 공경스럽게 전송하고 맞아들이며 조사·사마와 반열을 같이 하니 매우 해괴한 일이다. 어느 때의 법을 본받아서 그러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삼대(三代: 하·은·주)의 시대에는 장님을 시켜 시(詩)를 외고 북(鼓)을 두드리게 하였으니, 시를 외어 바른 일을 말하고, 북을 두드려 일식·월식을 막았다고 한다. 그들은 또 악(樂)을 맡았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이를 본받아 장님을 악원(樂院)에 예속시켜 두고 내전(內殿)에서 진연(進宴)할 때면, 맹인에게 눈 화장을 하고 악기를 들고서 연주하도록 하였으므로, 반열에 참여시켜서 어가를 전송하고 맞아들이는 것이다.
시(寺)의 호칭을 명통(明通)이라 한 것도 맹인 스스로가 호칭한 것은 아닌 듯하다. 여기에 대한 고사가 반드시 있을 것이나, 상고할 만한 사적이 없다. 맹인이란 혼돈세계 속에서 사는 사람으로 그 욕망은 오직 명통(明通: 눈이 밝게 뜨이는 것)에 있으므로, 그 청(廳)을 그렇게 이름 한 것이다. 그러나 맹인이란, 눈은 뜨지 않았으나 마음으로 사물을 보고, 또 귀는 어둡지 않아서 밖의 소리를 환히 들을 수 있어 이주(離朱)의 밝은 눈과 사광(師曠)의 밝은 귀에 다름이 없으니, 어째서인가? 이는 다름이 아니라, 의사(意思)가 전일(專一)하여 정신이 흩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명통의 의의도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명통시에 대한 변증설>
한편 《태종실록》에는 명통시가 아니라 명통사라고 되어 있다. 아마도 명통사는 원래 맹인들이 모인 절이었으나, 가뭄으로 고생하던 태종이 이들 맹인들이 올린 기우제의 효험을 본 후 국가 관청으로 인정해 명통시가 된 듯하다.
용재총화(齋叢話)
조선 전기의 학자인 성현(成俔)의 수필집. 3권 3책. 활자본.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조선왕조 역대 임금들의 실록(實錄)을 통칭하는 편년체 사서. 태조에서 철종까지 472년간에 걸친 25대 임금들의 실록 28종을 일컫는다. 국왕이 교체될 때마다 사관들이 다양한 자료들을 모아 편찬했다. 1,893권 888책. 필사본·영인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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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안산, 인왕산, 북악산, 낙산, 남산을 시작으로 서울의 성곽, 마을, 강으로 이어지는 한양의 역사를 하나하나 탐색한다. 조선의 왕, 지식인,..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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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맹인들을 위한 관청 명통시 – 서울, 한양의 기억을 걷다, 김용관, 인물과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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