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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장소 남산
봉화군의 봉수 상황은 매일 초저녁에 목멱산의 봉화군 한 명이 단봉문(丹鳳門) 밖에 와서 보고한다. 본산의 봉화 다섯 자루(柄)를 올리기도 하고 혹은 한 자루도 올리지 못했다는 뜻을 남소(南所)에 보고하기도 한다. 그런데 한 자루도 올리지 못하는 것은 곧 북도의 봉화(烽火)가 구름이 끼어서 알 수 없다는 의미다. 그곳의 부장이 제자리에서 병조에 보고하고, 병조는 이튿날 아침에 들어가 보고한다. 포군이 있는데 동쪽에는 다섯 포, 서쪽은 세 포, 남쪽은 여섯 포, 북쪽은 한 포가 배치돼 있으며 밤마다 기병 두 명이 시간 보고를 전하고 야간 순찰을 한다. - 《만기요람(萬機要覽)》 <군정> 편

남산은 봉수대가 다섯 개 있고 봉수대 아래로는 민가들이 부락을 형성하고 있었다. 한양부는 행정 조직상 5부(동부·서부·남부·북부·중부) 52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각 동부 12방, 남부 11방, 서부 11방, 북부 10방, 중부 8방이다. 남산 봉수대는 남부 11방에 속하며 각각의 지방으로 뻗은 산줄기의 뿌리를 이루는 산마루에 자리 잡았다.

남산 봉수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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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봉수대는 명철방(明哲坊: 오장동 부근)에 닿으며, 양주 아차산(봉화산)봉수대와 연락되었다. 제2봉수대는 성명방(誠明坊: 묵정동 부근)에 닿으며, 경기 광주의 천천(穿川: 천림산) 봉수대와 연락하게 하였다. 제3봉수대는 훈도방(薰陶坊: 예장동 부근)에 닿으며, 무악 동쪽 봉우리의 봉수대와 연락하게 하였다. 제4봉수대는 명례방(明禮坊: 명동 부근)에 닿으며, 무악 서쪽 봉우리의 봉수대와 연락하게 하였다. 제5봉수대는 회현방(會賢坊: 회현동 부근)에 닿으며, 양천 개화산 봉수대와 연락을 주고받게 하였다.

남산은 예로부터 고관대작들의 집이 즐비했다. 그중에 성종과 절친한 술친구 사이였던 손순효(孫舜孝)에 관한 이야기가 흥미롭다.

손순효의 호는 물재(勿齋)로 칠휴거사(七休居士)라 불렸다. 《대학(大學)》, 《중용(中庸)》에 밝았을 뿐 아니라 왕에 대한 충절 또한 깊었다. 하지만 큰소리치기를 좋아하고 술버릇이 별로 좋지 않아 국왕과의 술자리에서도 실수하는 일이 잦았다. 이와 관련해 《임하필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성종이 표문(表文: 조선 시대 중국에 보내는 외교문서)을 지을 일이 있어 대제학 손순효를 찾았다. 그는 그날 날이 저물어 들어왔는데 망건 밖으로 머리털이 풀어 헤쳐지고 얼굴에 술기운이 가득했다. 임금은 '경이 이미 취했으니 글을 짖지 못할 것이야 제학을 불러 짓도록 하지'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굳이 표문을 짓더니 부본(副本)까지 적었다. 임금이 그의 글을 보았는데 한 점 한 획도 더하지 않고 깎아낼 만한 글자도 없었다. 임금은 크게 기뻐하고 글을 승문원에 보내라 하였다. 이어 잔치를 베풀어 그를 즐겁게 했는데 궁녀들에게 명해 비파를 타게 하고 노래를 부르도록 하자 그는 또 흥에 겨워 춤을 추다 그만 엎어졌다. 그러자 임금은 남금단(藍錦段)으로 만든 철릭(天翼)을 벗어 덮어주었다.

또한 《해동잡록(海東雜錄)》에는 그를 아끼는 임금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긴 기사가 있다.

손순효의 집은 남부 명례방 산꼭대기에 있었다. 성종이 어느 날 저물녘에 내시 두세 명과 함께 경회루에 올라 남산 쪽으로 멀리 바라보니 몇 사람이 숲이 드문 곳에 둘러앉아 있었다. 성종은 그들이 손순효 일행일 것으로 생각하고 곧 사람을 보내서 알아보게 하였더니, 과연 그가 손님 두 명과 막걸리를 마시고 있는데 쟁반에는 오이뿐이었다. 임금이 술과 안주를 하사하니 손순효가 손님들과 더불어 머리를 조아리고 눈물을 흘리며 실컷 취하도록 마시고 헤어졌다고 한다.

손순효는 성종이 승하하자 주야로 통곡하다 하룻밤에 광기가 일어 옷을 벗고 남산 온 곳을 돌아다니다 병이 들어 죽었다고 한다. 항상 술을 대하면 반드시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을 칭송하여 '밝은 달은 밝다 하는데 밝지 않고 맑은 바람은 맑다고 하는데 맑지 않도다. 내 마음이 곧다 해도 곧지 못하니 밝은 달이 밝아질 때를 기다려 보리라'란 시를 읊조렸다고 한다.

남산에 살던 또 다른 고관은 세조의 측근이자 한명회(韓明澮)의 벗인 권람(權擥)이다. 그의 옛집 후조당(後凋堂)이 남산 북쪽에 있는 비서감(秘書監) 동쪽 바위 둔덕에 있었다. 권람이 살던 후조당은 오늘날 예장동으로 불리는 곳으로 예로부터 산수가 수려하고 조용해 문인들이 즐겨 찾던 곳이다. 권람은 말년에 후조당 벼랑 위에 작은 초당을 짓고 '소한당(所閑堂)'이라 이름 붙였다.

세조가 거둥한 뒤 서쪽 둔덕에 있는 돌샘을 '어정(御井)'이라 부른다. 그 위에 소한당의 유지(遺址)가 남아 있다. 당(堂)은 세 칸에 남쪽으로 온돌방이 있는데, 겨울에 따스한 볕이 들고 여름에 시원한 바람이 든다. 화려하게 꾸미지 않아서 푸른 언덕에 석양이 비낄 때면 창가는 쓸쓸하기만 하다.

권람 사후 6대째 사도공(司徒公: 형조판서 권반을 가리킴)에 이르러 비로소 중건되었다. 마룻대를 고치거나 기둥을 갈거나 하지도 않았고 또 더 꾸미지도 않았으며, 기울고 무너진 곳을 보수하고 때 묻은 곳이나 닦아서 집은 예나 다름이 없다.

집 남쪽 돌 아래에서 솟는 샘물이 매우 맑고 차갑다. 섬돌 밑은 모두 산돌에 펑퍼짐한 너럭바위이고 뜨락에 깎아지른 듯한 벼랑이 더욱 기이하다. 3월에는 산 꽃이 만발하고 동산에 꽉 들어선 소나무는 겨울 추위가 닥쳐와도 이파리가 변하지 않는다. - 《미수기언(眉叟記言)》

권람과 아주 친했던 상당부원군 한명회의 집도 이곳에 있었다고 한다. 한명회의 집 서쪽 언덕에는 석간천(石間泉)이 있었는데 세조가 이 두 권신을 만나기 위해 이곳에 방문했을 때 석간천의 물을 마신 것 때문에 '어정'이란 이름이 붙었다.

한편 남산에는 또 신선의 풍모를 한 기인도 살았다. 바로 박지원에게 주역을 가르쳤던 이윤영의 절친한 친구인 이인상(李麟祥)이다. 한겨울 남산에 눈이 내리면 그 눈을 밟고 신선처럼 내려오곤 했을 그는 한겨울에 꼿꼿하게 서 있는 잣나무 그림을 아주 좋아해 자주 그렸다. 무거운 눈을 어깨에 짊어진 잣나무의 그 푸른 기상을 보며 스스로 마음을 다잡을 터이다.

당시 사람들은 이인상을 기사(奇士)라 불렀다. 그는 몸이 수척하고 목이 길었으며 수염과 눈썹이 모두 희었다. 그런 그가 눈 쌓인 남산을 내려올 때는 마치 백발선인이 하산하는 것 같았다고 한다.

이인상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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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무(李德懋)는 《청정관전서》에서 이인상을 이렇게 평했다. "성품이 강직하여 과단성이 있었다. 함양에 일찍이 친하게 지내던 서생이 있었는데 그의 집에 찾아가지 못하는 이유를 '내 그대 집을 찾고 싶지만 길이 남인(南人) 촌을 지나므로 찾지를 못하네'라고 하였다."

그는 길이 아니면 가지 않는 사람이고 당이 다른(이인상은 노론) 사람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한다. 비록 서출이었지만 명문가 출신답게 시문과 학식이 뛰어나 시서화 삼절(詩書三絶)이라 불리며 문사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의 그림 <검선도(劍僊圖)>에는 고결한 선비 정신이 그대로 담겨 있다. 그는 남산을 상징하는 인물이자 조선 선비의 대표적 표상이었다.

이인상의 <검선도>

소나무 아래 선인의 모습을 통해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자신의 내면세계를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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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기요람(萬機要覽)
1808년에 서영보(徐榮輔)溯)·심상규(沈象奎) 등이 왕명에 따라 찬진(撰進)한 책. 국왕의 정사(만기, 萬機)에 참고하도록 정부 재정과 군정 내역을 모았다.

국역 임하필기(林下筆記)
조선 후기의 문신인 이유원(李裕元)의 문집. 1871년(고종 8년) 조선과 중국의 사물에 대하여 고증한 내용이다. 39권 33책. 필사본.

해동잡록(海東雜錄)
조선 중기의 학자 권별(權鼈)이 저술한 문헌설화집. 왕조별로 쓴 인물사적 자료집이다. 14권 14책. 영인본.

미수기언(眉記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허목(許穆)의 문집. 1689년(숙종 15년) 왕명으로 간행했다. 93권 25책. 목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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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관 집필자 소개

《월간축구》, 《골든에이지》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조선의 군주와 역사에 관심이 많아 《월간중앙》과 《한경리쿠르트》 등에 조선 역사의 흥미로운 이야기와 조선 군주의 리더십에 관한 글을 연재한 바..펼쳐보기

출처

서울, 한양의 기억을 걷다
서울, 한양의 기억을 걷다 | 저자김용관 | cp명인물과사상사 도서 소개

한양 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안산, 인왕산, 북악산, 낙산, 남산을 시작으로 서울의 성곽, 마을, 강으로 이어지는 한양의 역사를 하나하나 탐색한다. 조선의 왕, 지식인,..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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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길 따라 마음 따라 1. 광나루 2. 잠실나루 3. 뚝섬과 두모포 4. 동작나루와 노들나루 5. 마포 6. 양화나루와 난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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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남산의 봉화서울, 한양의 기억을 걷다, 김용관, 인물과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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