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의 기억을
걷다
인정받지 못한 시인의 슬픔
관련 장소 | 남산 |
---|
을지로 4가에 있는 청교(靑橋)에는 청녕위(淸寧尉) 한경침(韓景琛)이 살았다고 해서 청녕위 다리라고 불렸다. 박제가가 이곳 청교에 살다가 선친이 돌아가시자 묵정동으로 이사하고 다시 필동으로 이사했으니 남산골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백동수가 그의 집과 가까운 곳에 살았고 이덕무는 남산 중턱에 자리 잡고 살았다. 박제가가 살던 필동에도 그와 비슷한 시기 그와 비슷한 곳에서 18세기 한양 풍경을 시로 담고 있던 시인이 있었다.
배 잔뜩 부르게 저녁밥을 먹고 살랑살랑 부는 바람 맞으며 등불 들고 저잣거리 나서네. 서로 어깨 부딪고 발이 서로 밟히지만 사람들로 가득한 저잣거리 정말 좋구나!
한양 도심 한복판 저녁 풍경이 그림처럼 와 닿는 시다. 등불을 들고 저잣거리를 나서는 시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 시를 쓴 사람은 송목관 이언진이다. 하얀 피부에 말끔한 얼굴, 깨끗하다 못해 창백하기까지 한 젊은 시인은 어느 날 하인을 통해 박지원에게 시를 보낸다. 평가를 해달라는 뜻이다. 그러자 박지원은 "이건 오나라의 가는 침이야!"라고 일갈했다. 중국 북경 사람들이 남경 사람들을 비하할 때 종종 '오나라의 가는 침'이란 말을 했다. 시라기보다는 가벼운 말장난이란 뜻일 게다. 이언진과 같은 동네 살던 박제가를 맞이할 때는 버선발로 나와 마중하고 손수 밥을 지어 옥소반에 받쳐 내오던 그가 왜 이언진에겐 이런 모멸과 수치감을 심어주었을까?
이언진의 집안은 대대로 역관을 배출했던 강양 이씨다. 스무 살에 역관 시험에 합격해 역관이 됐고 동갑내기 유씨에게 장가가서 딸 하나를 얻었다. 청나라에도 몇 번을 다녀왔으나 시에 대한 갈증 때문에 역관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고 한다. 박지원에게 모욕을 당한 뒤로는 심한 우울증까지 겪는다.
우상(이언진의 자)은 누군가에게 귀중한 책을 빌려 갈 때면 소매 속에 넣어가지고 오면서 집에 올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길 위에서 펼쳐 보며 총총히 걸어오다가 사람이나 말과 부딪치고는 아픔도 깨닫지 못했다. - 《청성잡기(靑城雜記)》
박지원의 친구인 성대중은 이런 이언진을 항상 안타깝게 생각했다. 두 사람은 1763년 계미사행 일원으로 함께 일본에 다녀오기도 했는데, 그때 이언진은 빠른 솜씨로 시와 그림을 그려 일본인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얻었다. 1766년 가을 어느 날, 성대중이 이언진의 집에 찾아갔다. 그 무렵 이언진은 더욱더 병이 깊어 있었다.
연암에게 모욕을 받은 이언진은 도무지 밥숟갈을 뜨지 못했고 온종일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다 슬프게 눈물 흘리기를 반복했다. 성대중은 이언진이 밥을 먹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 꿩을 잡아다 주었다. 그렇게 성대중이 돌아간 그날, 이언진은 밤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다 집 앞마당에 그동안 자신이 쓴 시를 갖고 나왔다. 그리고 낙엽이 쌓인 곳에 불을 피웠다.
달도 없는 그믐, 이언진은 그동안 써온 시의 초고들을 한 장씩 불 속에 넣었다. 손은 떨고 있었고 눈에서는 눈물이 연신 쏟아지고 있었다. 한 사내가 삶의 마지막을 그렇게 슬프게 보내고 있었다. 아내가 시를 담은 보자기를 빼앗았다. 이렇게 해서 이언진의 시는 얼마간 건질 수 있었다. 며칠 뒤 이언진은 숨을 거두었다.
그 후에도 여전히, 오늘날 탑골공원 자리에 있는 원각사지 10층 석탑 부근에서 걸인 혹은 기인처럼 살고 있던 박지원은 박제가와는 꾸준한 학문적·문학적 교류를 쌓아갔다. 인근에 살던 이덕무, 유득공 등 문인들도 박지원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자연스럽게 백탑동인(白塔同人)이 탄생하게 되었는데, 이들이 남긴 문학작품은 오늘날 18세기 산문문학의 백미로 꼽힌다. 이념적으로는 북학파면서 박지원의 문인들이라고 해서 연암사단이라고도 불린 이들은 서얼의 신분을 가리지 않는 정조의 인사 정책으로 중용되면서 조정에 참신한 바람을 일으키게 된다.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글
출처
한양 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안산, 인왕산, 북악산, 낙산, 남산을 시작으로 서울의 성곽, 마을, 강으로 이어지는 한양의 역사를 하나하나 탐색한다. 조선의 왕, 지식인,..펼쳐보기
전체목차
백과사전 본문 인쇄하기 레이어
[Daum백과] 인정받지 못한 시인의 슬픔 – 서울, 한양의 기억을 걷다, 김용관, 인물과사상사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