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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 한양
의 기억을
걷다

도성 사람들이 백로처럼 모여 관전한 무악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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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장소 안산

안산에 얽힌 역사적 이야기로 이괄(李适)의 난과 무악 전투를 빼놓을 수 없다. 1624년(인조 2년) 1월 24일, 평안병사인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미 이귀 등이 이틀 전부터 이괄의 반란을 고변했지만 임금은 그 말을 듣지 않고 편안하게 《논어》 강론만 했다.

반군이 몰려오며 상황이 급박하게 전개되자 조정에서는 반란군과 내응할 것을 염려하여 반정 이후 죽이지 않은 전 영의정 기자헌 등 죄수 35명을 처형하고 이괄의 처와 자식도 죽였다.

2월 8일 이괄의 반군은 임진강까지 남하했다. 인조는 원래 강화로 피신하려 했지만 이미 임진강 근처까지 반군이 포위하고 있다는 소식에 서둘러 공주산성으로 피난길을 떠났다. 그날 밤, 왕비와 대비 모두 가교(駕轎)를 타고 왕은 소여(小輿)를 타고 숭례문에 이르렀다. 승지 홍서봉이 앞에 있다가 돌로 문의 자물쇠를 부수게 하여 나아갔다. 숭례문을 지키는 문지기도 이미 도망간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공조정랑 이진영을 먼저 한강에 보내어 배를 구하게 했는데 한 척도 구할 수가 없었다. 과거 임진왜란 당시 피난 가는 선조가 한강을 건넌 뒤 배를 모두 불살라버린 전력이 있기 때문에 백성들은 배를 숨기고 내주려 하지 않았다.

임금의 피난 행렬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는 사이 무사 우상중이 한강을 헤엄쳐 건너가서 배 안에 있던 사람을 베고 배를 빼앗아 돌아왔다. 임금이 탈 배를 마련하기 위해 죄 없는 민간인들을 죽였다는 기록이다. 이렇게 빼앗은 배를 육지에 대니 왕을 수행하던 자들이 서로 다투어 건너려고 우르르 몰려들었다. 이경직이 칼을 뽑아들고 이들을 꾸짖었다. 이어 왕이 배에 올랐으나 배는 강물 가운데 떠 한참을 있었다. 먼저 강가에 도착해 왕을 호위해야 할 군사들이 미처 상륙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임금이 탄 배가 강물 한가운데에 떠서 도성을 돌아보니, 궁궐이 난민(亂民)에게 불태워져 불꽃이 하늘로 치솟았다. 이괄은 영변에서 한성까지 진군하는 동안 관군의 강한 반격이나 저지가 예상되면 샛길을 택해 나갔고, 그 행군 속도가 대단히 빨라 관군의 혼란을 가져왔다. 영변을 출발한 지 20일이 못 되어 반군의 기병 선봉대가 한성에 도착했다. 이미 전날 인조와 조신들이 공주로 떠난 뒤였으므로 반군은 아무런 저항 없이 도성에 입성했다. 이괄은 경복궁 터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선조의 열째 아들 흥안군(興安君)을 새 왕으로 추대하였다.

안산 정상에서 아현동 방면을 바라본 모습

이곳에서 관군과 이괄의 반군이 맞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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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군과 반군의 운명을 건 승부는 2월 11일 안산(무악)에서 벌어졌다. 도원수 장만의 군사와 각지에서 모인 관군 연합군은 이괄의 뒤를 쫓아 서울 근교에 이르러 숙의 끝에 지형이 유리한 안산에 진을 쳤다. 관군이 안산에 진을 치게 된 것은 방어사 정충신의 주장에 따른 것이다. 그는 병법에 북쪽 산을 먼저 점거하면 이긴다는 말이 있다며 먼저 안산을 점거할 것을 주장했다. 안산에 진을 치면 도성을 내려다보게 되니 적이 덤비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적은 쳐다보고 공격해야 하므로 방어하는 자신들에게는 유리한 지점이니 틀림없이 적을 쳐부술 수 있다는 것이다.

관군이 안산을 점령한 사실을 다음 날(2월 11일) 아침에야 알게 된 이괄은 관군의 세력이 적은 것을 보고 도성 내 관민들에게, "장만의 군대쯤은 단숨에 무찔러보이겠노라. 싸움을 구경하고자 하는 자는 누구나 성 위에 올라 구경하라"라고 큰소리치며 곳곳에 싸움을 구경하라는 포고문을 써 붙였다. 마치 운동 경기를 홍보하는 듯한 광경이었다.

이 말을 들은 도성 안 사람들이 아침부터 인왕산 성벽을 타고 올라 싸움을 구경했는데, 마치 백로가 앉아 있는 듯했다고 한다. 반군은 경기감영(京畿監營: 현 적십자병원 자리) 근방에서 군대를 좌우로 나누어 한 대는 아현(阿峴, 애오개)을 지나 대현(大峴) 쪽에서 진격했고 다른 한 대는 경기중군영(京畿中軍營: 현 동명여자중학교 자리) 부근에서 무악을 향해 치달아 올라갔다. 그리하여 양편 군대는 안산 정상에서 가까운 험준한 비탈에서 싸우게 되었다.

마침내 전투가 벌어졌다. 처음부터 동풍이 세차게 휘몰아쳐 반군은 순풍에 돛을 단 듯 바람을 타고 기습 공격을 할 수 있었다. 관군은 죽기로 싸웠으나 수십 보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군에게 유리한 상황이 진행됐다. 그런데 전투가 무르익어갈 무렵 갑자기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동쪽에서 불어오던 바람은 서북풍으로 변했다. 무악산 정상을 쳐다보며 공격하던 반군은 바람을 안고 싸워야 하는 상황이 되자 휘날리는 먼지와 모래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이에 용기를 얻은 관군이 공격을 가하니 전세는 역전되었다.

경기감영터에 자리 잡은 적십자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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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묘시(卯時)에 시작된 전투는 4시간여에 걸쳐 치열하게 전개되었는데, 결과는 관군의 대승으로 끝났다. 반군 400여 명이 죽고 300여 명이 포로가 되었다. 이후 싸움이 벌어졌던 무악의 동쪽 봉우리를 승전봉(勝戰峰)이라 하였다.

한편 도성 백성들이 근처 돈의문(敦義門)과 소의문(昭義門)을 닫아버리는 바람에 반군들은 곧바로 성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돌아서 숭례문으로 들어왔다. 대패한 이괄은 주력부대를 이끌고 인조를 뒤쫓으려 광희문(光熙門)을 나가 삼전도를 거쳐 경기도 광주로 향했다. 거기서 목사 임회를 살해하고 다시 이천 방면까지 이르렀으나 그곳에서 부하 기익헌, 이수백 등에게 아들, 아우와 함께 죽임을 당하고 만다. 반란이 평정되자 인조는 2월 19일 공주를 떠나 사흘 후 한성에 돌아왔다.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던 안산 승전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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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관 집필자 소개

《월간축구》, 《골든에이지》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조선의 군주와 역사에 관심이 많아 《월간중앙》과 《한경리쿠르트》 등에 조선 역사의 흥미로운 이야기와 조선 군주의 리더십에 관한 글을 연재한 바..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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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양의 기억을 걷다
서울, 한양의 기억을 걷다 | 저자김용관 | cp명인물과사상사 도서 소개

한양 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안산, 인왕산, 북악산, 낙산, 남산을 시작으로 서울의 성곽, 마을, 강으로 이어지는 한양의 역사를 하나하나 탐색한다. 조선의 왕, 지식인,..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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