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의 기억을
걷다
다산 정약용의 세검정 추억
관련 장소 | 인왕산 |
---|
칼로 정의를 세운 곳인가? 아니면 칼로 권력을 찬탈한 곳인가? 세검정이란 이름이 생겨난 유래는 분명하지 않지만 세검정이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곳이라는 점은 분명했다. 세검정을 둘러싼 비봉, 문수봉, 보현봉, 북악산, 구준봉 등 화강암봉과 거기서 발원하는 맑은 물줄기가 모인 홍제천이 이루어낸 빼어난 경치는 그 연원에 관한 갖가지 설을 낳고 있다.
조선 시대에는 선왕이 죽으면 실록청을 세우고 임금 재위 시 시정기와 사관이 기록한 사초(史草)를 비롯한 다양한 공사 자료를 바탕으로 실록을 편찬했다. 세검정은 실록이 완성되면 그때 쓰인 사초를 물로 씻는 곳이었다. 그래서 세검정이란 이름이 붙었다는 설이 있다. 실록 편찬이 모두 끝나고 참고했던 사초를 세초하면 실록청이 할 일은 끝난 것이다. 그러면 왕은 수고한 자들에게 술을 내렸다. 차일암(遮日巖)은 세검정 주변 바위를 말하는데 바위 곳곳에는 연회를 하기 위해 차일을 쳤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래서 세검정을 세초연(洗草宴)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 세검정에서 사초 이외의 기록을 세초한 예외적인 사건이 있었으니 1776년 2월 4일 영조가 지시한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세초 사건이다. 죽음을 한 달 앞둔 영조는 아마도 사도세자의 죽음이 실록보다 세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승정원일기》를 지우고 싶었을 것이다.
전날 대리청정을 수행하던 손자 정조에게는 수은묘(사도세자의 묘)에 가서 아버지를 참배하라 명했는데, 수은묘에 참배 갔던 정조는 대궐로 돌아와 갑자기 영조에게 《승정원일기》의 임오년(사도세자가 죽은 해) 기록 부분을 세초해줄 것을 청한다. 이유는 조정의 평화를 위해 과거의 어두웠던 기억을 묻기 위해서라고 했다.
세검정에서 사초 이외의 역사책을 이렇게 공식적으로 세초한 일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런 씁쓸한 기억 때문일까? 1790년 9월 서총대(창덕궁 후원에 돌로 쌓은 정자)에서 활쏘기 시험을 관전하고 난 정조는 편여(便輿)를 돌려 세검정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할아버지 영조가 지은 시를 보고 그 운을 따 칠언절구(七言絶句)를 짓고는 신하들에게 화답하여 올릴 것을 명한다.
한편 《궁궐지(宮闕志)》에는 세검정이란 이름의 유래에 관한 또 다른 기록이 있다. 인조반정을 주도한 이귀, 김류(金瑬) 등의 반정 인사들은 이곳에 모여 광해군의 폐위를 의논하고 세검입의(洗劍立義: 칼을 씻어 정의를 세움)를 했는데, 이것이 세검정이란 이름이 붙은 유래라는 것이다.
이름이 생긴 유래가 무엇이건 세검정의 경치가 수려하다는 사실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왕과 사대부, 여염집 자제 할 것 없이 이곳 세검정에서 한가로이 놀며 시를 짓기도 하고 바위에 글씨 연습을 하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또한 세검정은 도성 뒤편에 있었기 때문에 연산군 시절 임금의 음행이 가장 빈번했던 곳이란 기록도 있다.
혈기 왕성한 청년 시절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도 친구들과 함께 세검정에서 놀았던 추억을 글로 남겼는데 <유세검정기(遊洗劍亭記)>란 글이다.
세검정의 구경거리는 소나기가 쏟아질 때 하는 폭포 구경이다. 그러나 비가 한참 내리는 동안에는 사람들이 비에 젖어가며 말에 안장을 얹고 교외로 나서려 하질 않는다. 그러나 비가 개면 산골 물 또한 이미 기세가 시들하며 줄어든다. 그래서 세검정 가까이에 사는 사대부들도 세검정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사람은 드물다.
신해년 어느 여름날 나와 한혜보 등 여러 사람이 명례방(지금의 명동)에서 자그마한 술자리를 가졌다. 술잔이 돌고 있는데, 갑자기 하늘이 먹구름으로 까맣게 변하더니 천둥과 번개가 우르르 울리기 시작했다. 내가 술병을 차고 벌떡 일어나 "폭우가 쏟아질 징조일세. 자네들 세검정에 가보지 않겠나? 거기에 가지 않는 사람은 내가 벌주로 술 열 병을 주지"라고 했다. 그러자 모두들 좋아하였다. …… 말을 달려 세검정 아래 이르니 수문 좌우 산골짜기 사이로 암고래, 수고래가 물을 뿜어내는 듯했고 옷소매 역시 빗방울로 얼룩덜룩했다. 정자에 올라 자리를 펴고 앉으니, 난간 앞의 나무들은 이미 미친 듯 나부끼고 뿌려대는 빗방울로 한기가 뼈에 스몄다. …… 곧이어 대동한 하인들에게 술과 음식을 내오게 하니 농지거리가 질탕하게 일어났다. 잠시 있으니 비가 그치고 구름도 걷혀 산골 물도 잔잔해졌다. 저녁 해가 나무 사이에 걸려, 울긋불긋 온갖 광경을 연출하였다. 우리들은 서로 누워서 시도 읊조리고 농담도 하였다.
이 글은 정약용이 서른 살 되던 해 지은 글이다. 자신만만한 젊은 문사의 화려하고 낭만적인 기상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함께 세검정에 모인 사람들은 '복숭아꽃이 피면 한 번 모이고, 살구꽃이 피면 한 번 모이고, 국화꽃이 피면 한 번 모이고, 겨울에 큰 눈이 내리면 한 번 모이던' 그의 친구들이다. 이들은 모일 때마다 붓과 종이 그리고 술을 준비하고는 거나하게 한 잔씩 들며 시를 읊조렸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조선 시대 왕명(王命)의 출납(出納)을 관장하던 승정원에서 국정 전반에 걸쳐 매일매일 취급한 문서와 사건을 날짜순으로 망라한 것. 3,243책. 필사본.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글
출처
한양 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안산, 인왕산, 북악산, 낙산, 남산을 시작으로 서울의 성곽, 마을, 강으로 이어지는 한양의 역사를 하나하나 탐색한다. 조선의 왕, 지식인,..펼쳐보기
전체목차
백과사전 본문 인쇄하기 레이어
[Daum백과] 다산 정약용의 세검정 추억 – 서울, 한양의 기억을 걷다, 김용관, 인물과사상사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