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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문동의 왕기를 누르기 위한 경희궁
관련 장소 | 경희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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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가장 많이 파괴된 궁궐이 경희궁과 덕수궁이다. 1895년 명성왕후가 일본 낭인들에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이듬해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있었다. 경복궁이 사변에 휩싸이면서 덕수궁은 규모가 확대된다. 1905년 덕수궁과 경희궁 사이에는 다리가 건설됐는데 모양이 공중에 떠 있는 구름 또는 무지개와 같다고 해서 구름다리 혹은 운교(雲橋)라고 했다. 무지개다리라는 뜻으로 홍교(虹橋)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 다리가 언제 사라졌는지는 알 수 없다.
러시아공사관이 있던 자리는 조선 초 상림원(上林園)이라 불리기도 했다. 《태종실록》에는 1413년 7월 2일 약 한 달 동안 도성에 비가 오지 않아 불안했던 태종이 상림원에서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태종은 이틀 전 취각령(吹角令: 도성의 70세 이하 남자들을 모두 소집하는 명령)을 내리기도 하는 등 기우제 준비에 정성을 쏟았다. 실록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남자아이 수십 인을 모아서 도마뱀으로써 상림원에서 비를 빌도록 하였는데, 3일 만에 파하였다." 기우제가 성과가 있었는지 비가 조금 내려 아이들에게 포를 하사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이후에도 각지에서 기우제를 지냈는데 마침내 큰비가 내려 다시 정사를 돌볼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경희궁의 현재 모습은 궁궐의 원래 규모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앞서 돈의문에서 언급했듯 1617년(광해군 9년) 한양에는 '새문동에 왕기가 서려 있다'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새문동은 광해군의 동생 정원군(훗날 원종으로 추존되는 인조의 아버지)이 살던 곳이기도 했다. 그 왕기를 누르기 위해 정원군 집터에 궁궐을 지었는데 그것이 경덕궁이다. 경덕궁은 인조를 첫 주인으로 받아들인 뒤 철종까지 왕 열 명이 집무실로 사용한 곳이다. 1760년(영조 36년)에 이르러 경덕궁이 정원군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음이 같다고 해 현재의 이름인 경희궁으로 바뀌었다.
일제가 시행한 근대도시 개발에 따라 경희궁은 철저하게 파괴된다. 궁터 동쪽과 남쪽 일부가 도로로 편입되고 궁궐 안에는 경성중학이 들어섰다. 전각들은 여러 곳으로 팔려나갔다. 숭정전과 하상전은 조계사로, 홍정전은 일본인 절 광운사로, 홍화문은 이토 히로부미의 사당인 박문사로 팔려가는 등 옛 궁궐의 모습을 잃어버렸다(오늘날 숭정전은 동국대로 옮겨져 정각원으로 쓰이고 있으며, 흥화문은 경희궁으로 되돌아왔다).
해방 후 경희궁 터에는 서울고등학교가 들어섰다. 경희궁 터는 지난 1974년 현대그룹에 팔리는 운명을 겪기도 했으나 1980년 서울고등학교가 강남으로 이사한 뒤 서울시의 방침에 따라 서울역사박물관이 지어졌다. 그때 경희궁 일부를 복원했으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조선왕조 역대 임금들의 실록(實錄)을 통칭하는 편년체 사서. 태조에서 철종까지 472년간에 걸친 25대 임금들의 실록 28종을 일컫는다. 국왕이 교체될 때마다 사관들이 다양한 자료들을 모아 편찬했다. 1,893권 888책. 필사본·영인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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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안산, 인왕산, 북악산, 낙산, 남산을 시작으로 서울의 성곽, 마을, 강으로 이어지는 한양의 역사를 하나하나 탐색한다. 조선의 왕, 지식인,..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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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새문동의 왕기를 누르기 위한 경희궁 – 서울, 한양의 기억을 걷다, 김용관, 인물과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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