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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기억을
걷다
독립문 주변의 도시 속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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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문 남쪽 서대문구 영천시장 입구에 있던 다리를 석교(石橋: 석다리)라 하기도 하고 혁교(革橋)라 부르기도 했다. 그래서 다리의 남쪽 동네를 교남동, 북쪽을 교북동이라 했다. 교남동 개천 아래에는 소나무들이 즐비했다. 그 길을 송월길이라 했는데 오늘날에도 길 이름이 남아 있다. 다리 밑으로는 인왕산에서 내려온 물이 만초천(蔓草川)까지 흘렀다.
적십자병원 자리에 있던 경기감영(현 경기도청) 앞 개울에 놓인 다리를 경구교(京口橋) 혹은 이를 줄여 경교라고 했다. 종로구 평동(平洞)에 있던 김구의 개인 사저를 경교장(京橋莊)이라 불렀던 것도 이 다리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경교장은 금광을 경영하던 최창학이 김구에게 기증한 개인 주택이다. 1949년 김구가 안두희의 흉탄을 맞고 서거한 장소이기도 하다.
평동이라는 동명은 이 지역이 안산과 인왕산 사이에 낀 분지형 지대기 때문에 붙은 말이다. 낮고 평탄해서 살기 편한 곳이라는 뜻으로 거평동(居平洞)이라 하고 이를 줄여서 평동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했다. 이곳 평동에서 박지원은 오랫동안 빚에 쪼들린 삶을 살았다. 권신 홍국영의 눈 밖에 나 도성을 떠나 황해도 금천의 연암골에 정착했던 박지원은 농장 경영에 실패한 뒤 1780년대 초 서대문 밖 평동 근처에서 은둔하고 살았다.
아침에 일어나 새가 지저귀고 있기에 부채를 들어 책상을 치니 마구 외치기에 가만 들어보니 내가 당신에게 하고자 하는 '날아갔다 날아오는' 글자요. 또 그다음에 하고 싶은 '서로 울고 서로 화답하는' 글자입니다. 이들이 지저귀는 소리보다 더 훌륭한 문장이 어디 있소. 나는 오늘 참 멋진 글을 읽었습니다. - 《연암집燕巖集》 제5권
연암은 이곳에서 오유선생(烏有先生: 허깨비선생)이라 불리며 아웃사이더의 삶을 살았다. 마침 평동이 돈의문 앞이라 대궐을 출입하던 관리들을 불러 술과 낚시를 즐기기도 했다.
또한 평동에서 대각선으로 마주한 미동(美洞)은 미나리꽝이었던 곳이다. 오늘날 경찰청 자리인 회현방과 장흥방 사이에 걸친 동네를 잘 묘사한 글이 있어 흥미를 끈다. 이건창(李建昌)의 글 《수당기(修堂記)》다. 강화도에서 살던 그가 서울에 올라와 친구와 함께 지냈던 곳이 바로 그 미동 부근이었다.
우리 집은 강화도의 해변에 있는데 원팔 이남규는 대호(大湖: 의림지)의 서쪽에 살고 있으니, 그 거리가 수백 리나 된다. 그 사이 내가 그의 이름을 듣고 만나고 싶어 한 지가 무릇 십 년이 되었다. 그런데 지금 서울에 와서 그를 만나게 되었으니, 그 기쁨이 과연 어떠한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미나리골이란 골목이 서울의 회현방과 장흥방 사이에 끼어 있는데, 그 골목길이 마치 소라 껍데기인 양 개미 길인 양 빙글빙글 돌고 꺾어진 것이 좁고 누추해 거마가 다닐 수 없었다. 우리 두 사람은 이런 곳에 우거하고 있다. 그래서 언제든지 서로 찾고 싶기만 하면 문을 열고 나서는데, 옷을 걸치고 미처 옷고름을 매기도 전에 벌써 상대방의 거처에 이르게 된다. …… 그러나 나나 군이나 모두 대대로 시골에서 살면서 조상의 논밭을 지켜온 자들이니 고향의 아름다움, 그늘을 드리워주는 나무숲들이나 맑은 샘물이 졸졸거리는 물줄기들하며, 또 높이 올라서서 먼 곳까지 조망할 수 있는 경관들이 모두 즐길 만한 것들이다.
또 집 문 앞에는 바닷물이 곧장 서로 통하고 있어서 만약 바람이 고르고 밀물이라도 한껏 밀어 오르는 날이면 가히 하루 동안에 서로 간에 오고 가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만약 광원(廣遠)하고 청한(淸閑)한 경계를 만나서 서로 간에 마음을 터놓고 자신의 존재마저 잊어버린 채 평소에 품은 생각들을 남김없이 쏟아놓는다면, 그와 같은 즐거움을 또 어찌 이루 다 말로 할 수 있겠는가?
이 글은 이건창이 이남규 문집인 《수당집(修堂集)》의 서문을 쓴 글인데 글의 맥락은 이 답답한 도시를 떠나 시골로 가자며 유혹하는 내용이다. 도성 안에 살면서도 멋과 풍취를 찾아보려는 그의 고뇌가 엿보인다. 친구의 문집 서문에 쓴 글치고는 참으로 감성이 넘친다.
이건창의 선대들은 강화도에서 양명학을 공부하며 벼슬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이건창은 14세 때 별시 문과에 급제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조선 최연소 과거 급제자인 셈이다. 당색을 떠나 촉망되는 인재로 주목을 받던 그는 홍문관에 들어가 19세기 말 조선의 유학자들과 학문적 교류를 넓혔다. 똑똑하고 강직했던 이건창은 충청감사 조병식의 비행을 낱낱이 고해 벼슬이 황해도 관찰사까지 올랐으나 이내 반대파의 탄핵으로 유배된다. 유배에서 풀려난 후에는 조정의 부름을 받아도 나가지 않고 고향 강화도에서 삶을 마쳤다.
다시 평동으로 돌아와 송월길 오른편 성곽을 따라 올라가면 홍파동(紅把洞)이 나온다. 홍문동(紅門洞)과 파발동(把撥洞)의 머리글자를 따서 이름이 붙은 이 동의 대표적 유적은 홍난파 가옥과 권율 장군 집터다. 현재 권율 장군 집터에는 은행나무만 우뚝 서 있을 뿐 집은 사라지고 없다. 배제대학교 뒤편 필운대 이항복 집도 권율 장군의 집이었지만 딸과 사위에게 그 집을 넘기고 이곳으로 이사한 듯하다.
권율은 임진왜란 때 광주 목사, 전라도 순찰사, 도원수 등을 역임하며 7년간 군대를 총지휘한 장군이다. 바다에선 이순신이 영웅이었다면 육지에선 권율이었다. 병력 4천 명을 이끌고 왜군 3만 명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행주대첩은 진주대첩, 한산도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다.
1593년 2월 12일에는 권율 장군의 군사와 왜군 3만 명이 행주에서 맞부딪쳐 왜군이 대패를 당하고 말았다. 4월 26일 권율이 성안으로 들어가 도성 안을 살펴보니, 사람들이 살던 집에는 시렁 하나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모든 것이 불에 타서 없어져버렸다. 남산 아래에는 군량미 2만여 섬을 비롯해 군기(軍器)·유기(鍮器) 등의 물품들이 쌓여 있었는데, 마치 구릉이나 산 같았다. 여러 장수들이 하루를 머문 다음 명나라 기병 5천여 명은 각자 사흘 치 양식을 지참해서, 적의 무리를 추격하며 곧바로 영남으로 내려갔다. - 《고대일록》 제1권, <계사>
수당집(修堂集)
조선 말기의 의사(義士)인 수당(修堂) 이남규(李南珪)가 쓴 시문집. 11권 1책. 필사본·영인본.
고대일록(孤臺日錄)
조선 중기 학자이자 의병장인 정경운(鄭慶雲)이 일기체로 쓴 책.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선조 25년) 4월 23일부터 1609년(광해군 10년) 10월 7일까지 약 18년간의 일기를 수록했다. 4권 4책. 필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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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안산, 인왕산, 북악산, 낙산, 남산을 시작으로 서울의 성곽, 마을, 강으로 이어지는 한양의 역사를 하나하나 탐색한다. 조선의 왕, 지식인,..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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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독립문 주변의 도시 속 삶 – 서울, 한양의 기억을 걷다, 김용관, 인물과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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