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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
혜화동 고개 동소문로 이야기
관련 장소 | 혜화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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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인지문에서 동소문(東小門)까지 성곽은 제법 높다. 1760년(영조 36년) 1월 22일 동지사 이천구는 도성을 방어하는 방법에 대한 상서를 올렸다.
돈의문에서 북쪽으로 동소문까지는 실로 천험(天險)의 지역이고, 동소문에서 남쪽에 있는 동대문까지도 역시 험한 지역이며, 동대문에서 수구문까지가 조금 평탄하기는 하나 성첩이 두텁고 완벽하니 족히 방어할 만합니다. - 《영조실록》, 1760년 1월 22일
동소문 주변은 지금도 성 안팎의 고도 차가 꽤 크다. 그러니 적들이 침략한다고 해도 기어오르기 쉽지 않다는 설명이다. 동소문의 정식 명칭인 혜화문(惠化門)은 도성의 북대문인 숙정문이 폐쇄됨에 따라 창의문(북소문)과 함께 북문의 역할을 분담했다. 그 후 여러 차례 수리를 거쳐 한말까지 보존돼오다 1928년 일제의 도시계획으로 문루가 헐렸다. 1939년에는 전찻길을 낸다는 핑계로 나머지 석축(石築)과 홍예(虹霓)도 헐려서 지금은 옛 형태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동소문과 서소문에 예전에는 망루가 없었는데, 금위영 서소문 문루의 편액을 '소의문', 어영청 동소문 문루의 편액을 '혜화문'이라 하도록 명하였다. - 《국조보감》 제63권
혜화동 고개에 있던 동소문에서 이름을 딴 동소문로는 서울 도심지로 들어가는 주요 도로다. 《도성대지도(都城大地圖)》에는 이 길에 창경궁과 성균관이 있었고, 동소문을 통해 의정부·포천·철원 방면으로 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조선 중기에 이기가 지은 시화잡록집(詩話雜錄集)인 《송와잡설(松窩雜說)》에는 서울을 방문한 시골 사람이 동소문로에서 성균관을 보고 나눈 대화가 나온다.
함경도는 …… 조정과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 수령이 두려워하거나 꺼리는 것이 없이 오로지 가혹한 징수와 혹독한 형벌을 일삼았고, 백성을 초개같이 여겼다.
그래서 백성 또한 수령을 낮도둑이라 지목하여 원수같이 여겼다. 간혹 문관(文官)을 가려서 보내기도 하나 백성의 기대에 걸맞은 사람은 아주 적었다. 북도 시골 사람으로 서울에 처음 온 자가 있었는데, 동소문으로 들어와 성균관 앞길에 이르러서는 같이 온 사람에게 "여기는 어느 고을 읍내이기에 관사가 이같이 높고 넓은가?"하고 물으니, 같이 온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모르는가? 여기는 읍내가 아니라, 조정에서 낮도둑을 모아서 기르는 곳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이 비록 너무 감정이 북받쳐서 한 말이고 그 마음이 이해는 가지만 듣기에 또한 괴이하다.
성균관을 가리켜 '여기는 낮도둑을 기르는 곳'이라고 표현하는 서울 사람 말이 재미있다. 가만히 앉아서 일도 안 하고 노역하는 백성에게 세금이나 받아서 호의호식하니 낮도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글에는 그런 응어리가 담겨 있다.
양현고는 성균관의 재정을 담당했던 곳인데 그 규모가 자못 대단한 듯하다. 유생들 400명을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일을 하니 그 밑에서 수발하는 사람들까지 대궐 규모는 아니라도 대략 3분의 1 정도는 됐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종종 실록에는 양현고 재정이 부족하다는 기사가 등장한다.
흥인지문에서 혜화문으로 가는 길은 흥덕사(興德寺)와 북관왕묘에 이르는 길로 '한도십영(漢都十詠: 한양의 아름다운 열 가지 풍경)'의 하나인 '흥덕상화(興德賞花)'를 즐기는 인파가 모여들던 길이다. 오늘날 대학로 길과 비슷하다. 이 흥덕사에는 미신을 믿은 세종대왕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진다.
새벽에 임금이 두어 사람과 함께 대비를 모시고 가만히 동소문으로 나아가 흥덕사에 행차를 정하니, 다른 대군이 도보로 따르다 임금이 간 곳을 잃었다. 해가 저물어 다시 성안으로 돌아왔는데 이날 대비의 병환이 나으므로, 이후로 임금은 밤마다 대비를 모시고 행차를 다녔는데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했다. - 《세종실록》, 1420년 6월 26일
어머니 몸에 귀신이 들었다고 믿은 세종대왕이 잠행(潛行)을 하며 귀신들을 피하고 다닌 것이다. 조선은 강력한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을 펼치며 불교를 억압했지만 왕과 왕실은 사적으로는 여전히 불교를 믿었다. 많은 종파가 교종과 선종으로 통합된 조선 불교에서는 양자가 명확히 구분된다.
교종은 수행 방법으로 점수(漸修)를 추구한다. 점수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꾸준히 갈고 닦아야 한다는 뜻이다. 서울 동부 연희방(燕喜坊)에 있던 흥덕사가 바로 교종의 총본산이었다. 태조의 첫째 부인 신의왕후를 모시던 이 절은 1401년(태종 1년) 여름에 태조가 살던 집 동쪽에 창건되었다가 연산군 때 폐사됐다. 연산군이 창경궁을 확대하면서 궁과 인접했다는 이유로 폐사한 듯하다. 이후 흥덕사 터는 북관왕묘(관우 사당)로 쓰이기도 했다.
반면 교종과 대비되는 선종은 돈오(頓悟)를 중시한다. 돈오는 갑자기 깨달음을 얻는 수행 방식으로 선종의 본산은 정릉에 있던 흥천사(興天寺)다. 이 절은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를 모시고 있었다. 사리각(舍利閣)이 있으며 5층 높이로 들어섰는데 절 안에는 불경과 보물을 간직했다.
왕위에 오른 태종이 신덕왕후를 후궁의 지위로 격하하고 능을 이장했을 때도 흥천사는 그대로 두었다. 그러다가 연산군 때 폐사되어 분사복시(分司僕寺)가 되었고, 중종반정 이후 계속 관청으로 활용했다. 그러나 1510년(중종 5년) 3월에 이르러 중학(中學: 중부학당)의 유생들이 이단을 쓸어버리자고 외치며 야음을 틈타 부숴버리는 바람에 건물은 사라지고 사리각만 남았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조선왕조 역대 임금들의 실록(實錄)을 통칭하는 편년체 사서. 태조에서 철종까지 472년간에 걸친 25대 임금들의 실록 28종을 일컫는다. 국왕이 교체될 때마다 사관들이 다양한 자료들을 모아 편찬했다. 1,893권 888책. 필사본·영인본.
송와잡설(松窩雜說)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기(李墍)가 쓴 시화잡록집(詩話雜錄集). 필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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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안산, 인왕산, 북악산, 낙산, 남산을 시작으로 서울의 성곽, 마을, 강으로 이어지는 한양의 역사를 하나하나 탐색한다. 조선의 왕, 지식인,..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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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혜화동 고개 동소문로 이야기 – 서울, 한양의 기억을 걷다, 김용관, 인물과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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