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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 한양
의 기억을
걷다

이항복이 은둔한 도심 한복판의 백사실

요약 테이블
관련 장소 북악산

인조반정을 일으킨 반정 세력이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남긴 첫마디는 "김류가 백사 이항복을 찾아뵈오니 그대가 종묘사직을 지키라. 나는 그대를 믿고 떠난다"는 말이었다. 반정 세력들이 죽은 이항복을 들먹인 것은 덕망 높고 백성들에게 깊이 신뢰받던 그의 후광을 얻고자 함이었다. 이항복이 오랫동안 백성들 마음속에 남아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정조는 《홍재전서》 <일득록>에서 이항복을 이렇게 평했다.

덕망과 공로와 문장과 절개 중 하나만 얻어도 어진 재상이라 하겠는데, 하물며 한몸에 다 겸했다. 세상에 전하는 우스갯소리들이 모두 백사의 것은 아니겠지만 나라 사람들이 그를 아끼고 사모하는 마음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임진왜란을 겪고도 모자라 또다시 병자호란에 휘말리면서 17세기 조선은 전쟁과 기아, 당쟁으로 신음했다. 굶어 죽는 백성이 속출하고 민심은 흉흉했다. 정치판은 동서 갈등, 남북 갈등으로 하루도 편할 날이 없던 광해군 시절이니 오죽 시끄러웠을까? 그 삭막했던 시절 백성과 조정의 중신들을 웃게 해준 것은 이항복의 유머와 여유였다. '오성과 한음'으로도 유명한 이항복은 굉장히 재치 있고 유머러스한 사람이었는데 그의 장인이었던 권율과의 일화에서 그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이항복과 권율이 임금을 뵈러 입궐하던 중이었다. 이항복은 더위를 유난히 많이 타는 권율에게 오늘은 버선을 벗고 신을 신는 것이 어떠냐고 권한다.

권율은 사위의 마음 씀씀이에 고마워하며 버선을 벗고 신발만 신은 채 궐로 들어갔다. 그런데 신료들 사이에 서 있던 이항복이 불쑥 선조에게 아뢰었다.

마마, 날씨가 몹시 덥습니다. 이렇게 더운 날에 연로한 신료들이 의관을 갖추고 신발까지 신고 있느라 곤혹스러운 줄로 아오니 신발만이라도 벗고 있게 하여주시옵소서.

선조는 이항복의 말을 기특하게 여겨 노신들에게 신발을 벗으라 했다. 모든 신료들이 신발을 벗었는데 권율만은 얼굴이 벌게져서 신발을 벗지 못하고 있었다. 선조가 재차 권율에게 신발을 벗어도 좋다고 하며 내관들에게 신발을 벗겨주라 했는데, 별안간 맨발이 드러나는 바람에 모든 신료와 임금이 깜짝 놀랐다.

제가 오늘 무례하게 된 것은 사위 이항복에게 속아 이리된 것이오니 용서하시옵소서.

자초지종을 들은 선조와 대신들은 배꼽을 움켜잡고 웃었다고 한다.

이렇게 전란의 고단함을 해학으로 달래주던 이항복은 말년에 오늘날 백사실 계곡에서 세상의 온갖 잡음에 눈과 귀를 닫고 은둔했다. 그래도 알 만한 사람은 찾아오는 그런 곳이었다.

필운대가 인왕산 자락이라면 맑은 계곡과 흰모래가 있는 백사실은 북악산 뒤편이다. 이항복이 호를 백사(白沙)로 지은 것은 이곳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이항복은 꿈에서 본 이곳 풍경을 글로 남겼다.

신축년(1601년) 정월 11일 밤에 꿈을 꾸었는데, 공무를 보느라 비를 맞으면서 어디를 가는 듯하였다. …… 어느 한 곳을 찾아 들어가니, 산천이 기이하고 탁 트였으며, 길옆의 한 언덕을 쳐다보니, 새 정자가 높직하게 서 있었는데, 지나는 길이라 올라가 구경할 겨를이 없었다. 곧장 막다른 협곡에 다다르니, 협곡 안에는 마치 불사(佛寺)와 같은 큰 집이 있고 그 곁에는 민가(民家)들이 죽 열 지어 있었다.

그 큰 집에 들어가서는 마치 무슨 일을 한 듯하나 잊어버려서 기억하지 못하겠다. 여기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다가 다시 아까 지나갔던 언덕에 이르니, 그 언덕 밑은 편평하게 탁 트인 광장이 되었고 그 위에는 백사(白沙)가 죽 펼쳐져 있는데, 그 주위가 수천 보쯤 되어 보였다. 또 백 아름쯤 되는 큰 나무 다섯 그루가 광장 가운데 늘어서 있는데, 일산(日傘) 같은 소나무 가지가 은은하게 빛을 가렸다.

마침내 등성이를 타고 올라가서 비로소 새 정자에 올라가 보니, 정결하고 산뜻하여 자못 별천지와 같았다. …… 형세를 두루 살펴보니, 사방의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싼 한가운데에 큰 들판이 펼쳐져 있고, 석봉 세 개가 들 가운데 우뚝 일어나서 그 형세는 마치 나계(螺螺)와 같았다. 이것이 구불구불 남쪽으로 내려가서 중간에 꺾어졌다가 다시 뾰족하게 일어나서 언덕이 되었는데, 언덕의 높이는 겨우 두어 길쯤 되었고 정자는 바로 그 언덕 위에 있었다. …… 이 정자 앞에서 동천(洞天: 경관이 빼어난 산과 계곡)이 둘로 나뉘는데 두 동천에서 나오는 물은 마치 흰 규룡(虯龍)이 구불구불 굼틀거리며 가는 것 같았다. 한 가닥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고 또 한 가닥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흘러 두 가닥이 이 정자 밑에서 서로 합하여 한 물줄기로 돌아나갔다.

이 물은 넓이가 수백 보쯤 되고 깊이는 사람의 어깨에 찬다. 깨끗한 모래가 밑바닥에 쫙 깔려 있는데 맑기가 마치 능화경(菱花鏡)과도 같아서 오가는 물고기들이 마치 공중에서 노니는 것 같았다. …… 나는 평생 구경한 것 가운데 일찍이 이러한 경계(境界)는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정자 주인이 누구냐고 물으니, 오음(梧陰: 해원 부원군 윤두수의 호)의 별장이라고 하였다. …… 나는 이곳을 비밀에 붙여 남에게 말하지 않고 스스로 취하는 것이 낫겠다 생각하고, 그 정자를 '필운별서(弼雲別墅)'라 고치고 절대로 윤씨 집 사람들에게 천기를 누설하지 않았다. 이 꿈을 이튿날 아침에 기록하다. - 《백사별집(白沙別集)》 4권, <기몽(記夢)>
백사실 계곡의 이항복 별서에 있는 연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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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꿈속에서 얻은 백사실 계곡은 오늘날에도 그 풍취가 그윽해 서울 도심 안 선경(仙境)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창의문을 지나 세검정 가는 내리막길 양편으로 오른쪽 산골짜기 계곡에 백사 이항복의 꿈속 길이 현실로 나타나고 또 그 반대편은 이항복보다 138년 전에 태어난 안평대군이 꿈속에서 무릉도원을 보고 집터로 정한 무계정사가 있다. 무계정사 옆 바위에는 청계동천(靑溪洞天)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고 백사실 계곡 주변에는 백석동천(白石洞天)과 월암(月巖)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어 당시의 풍류를 전해준다.

바위에 새겨진 백석동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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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에 새겨진 월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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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은밀하고 호젓한 오솔길이 펼쳐진 백석동천 길은 세속에 찌든 먼지를 털어낼 만한 청정 지역이다. 창의문을 지나 부암동 고갯길 오른편으로 카페들이 즐비한 길을 계속 올라가다 보면 숲 속으로 들어서는 오솔길이 나오는데, 그 길을 따라가면 세검정으로 이어지는 숲길이 나온다.

이 숲길은 한 번 가본 사람이라면, 그 아늑함을 잊지 못해 다시 찾게 되는 그런 곳이다. 여름에는 맑은 물소리가 들리고 무더위를 식혀줄 시원한 바람도 항상 주변을 맴돌고 있으니, 가볍게 한 두 시간 산책한다는 마음으로 가는 것도 좋다.

홍재전서(弘齋全書)
조선 시대 제22대 임금 정조의 어제(御製)를 모아 엮은 문집으로 정조 재위 당시부터 수차례 편찬 과정을 거쳐 출간했다. 184권 100책. 활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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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관 집필자 소개

《월간축구》, 《골든에이지》에서 기자로 활동했다. 조선의 군주와 역사에 관심이 많아 《월간중앙》과 《한경리쿠르트》 등에 조선 역사의 흥미로운 이야기와 조선 군주의 리더십에 관한 글을 연재한 바..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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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양의 기억을 걷다
서울, 한양의 기억을 걷다 | 저자김용관 | cp명인물과사상사 도서 소개

한양 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안산, 인왕산, 북악산, 낙산, 남산을 시작으로 서울의 성곽, 마을, 강으로 이어지는 한양의 역사를 하나하나 탐색한다. 조선의 왕, 지식인,..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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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길 따라 마음 따라 1. 광나루 2. 잠실나루 3. 뚝섬과 두모포 4. 동작나루와 노들나루 5. 마포 6. 양화나루와 난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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