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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기억을
걷다
이항복 집터에서
관련 장소 | 인왕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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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운대는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집이 있던 곳으로 유명하다. 배화여자대학교 정문을 들어서서 학생회관 뒤편 식당 부근 어두컴컴한 담 위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한 모습을 한 바위에는 '弼雲臺(필운대)'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서울문화재자료 제9호로도 지정된 이 문화재는 몇 차례 폭우와 장마를 거치고 난 뒤라서 그런지 당장에라도 무너질 듯하다. 이곳 필운대에 있던 이항복의 집 주변 풍경을 《신증동국여지승람》 3권에서 볼 수 있다.
필운대는 인왕산 아래에 있다. 백사 이항복이 소시(少時)에 대 아래 원수(元帥) 권율(權慄)의 집에 처가살이하였으므로 필운이라 불렀는데, 석벽에 새긴 '필운대' 세 글자는 곧 이백사의 글씨다. 대 곁 인가에 꽃나무를 많이 심었기 때문에 경성 사람들이 봄철 꽃구경할 곳으로 반드시 먼저 여기를 꼽았다. 육각현(六角峴)은 필운대 곁에 있는데 대와 함께 이름이 알려졌다. 담장 둘레가 매우 길기 때문에, 사람들이 만리장성 집이라 불렀다.
지금 그 기록을 따라 배화여자대학교 뒤편에 올라보면 교정 뒤에 계단이 있고, 앉아서 휴식을 취할 만한 허름한 정자 하나가 달랑 있다. 꽃과 나무가 울창한 그런 멋진 풍경과는 거리가 먼 을씨년스러운 광경이었다.
그 옛날 도성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곳, 그래서 해마다 봄이 되면 이곳에 올라 시를 읊던 그 많던 시인은 다 지하에 묻혔으니 그들은 알까? 그렇게 아름답던 곳이 이제 이처럼 허름하고 쓸쓸한 곳으로 변해버린 것을……. 서운한 마음에 그곳 가시 울타리가 쳐진 곳을 기웃거리다 그만 길을 잃을까 두려워 다시 올라간 길로 내려왔다.
여러 기록을 살펴보면 이항복의 옛집은 살구나무가 많아 시인, 묵객들이 많이 출입했다고 한다. 출입 인사 명단에는 허균(許筠)도 들어 있었다. 허균은 비록 이항복과 당은 달랐으나 이항복의 인품을 늘 존경해마지않았다. 광해군이 즉위하고 대북파가 정권을 잡았을 때 이항복은 이이첨, 허균 등의 인목대비(선조의 계비이며 영창대군의 어머니) 폐모론에 적극 반대하다 1618년 삭탈관직되었다. 강경파들은 이항복을 참형에 처해야 한다고 했지만 허균은 차마 찬성도 반대도 하지 못했다. 결국 이항복은 북청(北靑)으로 유배되었다가 허균이 죽기 불과 3개월 전인 1618년 5월 13일에 죽었다.
이제 이항복도 필운화류(弼雲花柳: 필운대의 꽃과 버들이라 하여 국도팔영 가운데 하나)도 사라지고 없다. 봄날 살구꽃 향기에 취한 조선 시인들의 글에도 종종 등장하는 이곳 풍경을 정선은 <필운상화(弼雲賞花)>라는 작품으로 남겼다. 그 풍경을 이젠 다시 볼 수 없을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
조선 시대의 인문지리서(人文地理書). 세종의 명으로 맹사성(孟思誠), 신장(申檣) 등이 썼다. 55권 25책. 목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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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도성을 둘러싸고 있는 안산, 인왕산, 북악산, 낙산, 남산을 시작으로 서울의 성곽, 마을, 강으로 이어지는 한양의 역사를 하나하나 탐색한다. 조선의 왕, 지식인,..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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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이항복 집터에서 – 서울, 한양의 기억을 걷다, 김용관, 인물과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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