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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야기 조선
왕조사

세도가문의 틈에 헌종의 몸부림

순조의 뒤를 이어 여덞 살의 나이 어린 헌종이 즉위하였다. 헌종은 순조의 손자이며, 앞서 대리청정을 하였던 효명세자(후에 익종으로 추존됨)와 신정왕후 사이에서 난 아들이었다. 헌종이 여덞 살이라는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기 때문에 당시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인 순원왕후, 즉 순조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순원왕후의 친정은 안동 김씨 김조순 가문이었다.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안동 김씨 가문은 급기야 헌종의 비마저도 김조순의 7촌 조카인 김조근의 딸을 맞아들였다. 이렇게 헌종 초는 수렴청정을 하는 순원왕후를 등에 엎고 안동 김씨 가문의 세도정치가 기승을 부렸다.

한편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기승을 부리던 시기, 왕대비 집안인 풍양 조씨는 왕대비의 후원을 받으며 또 하나의 세도가문으로 행세하였다. 이때 풍양 조씨 세도를 대표하던 인물이 조인영이었다. 조인영은 신정왕후의 부친인 조만영의 동생으로, 순조로부터 세손을 보좌하고 돕도록 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던 인물이었다. 조인영은 헌종이 즉위하자 특채로 이조판서에 제수되었다. 이때 조카인 조병현이 형조판서에 재직하고 있을 때였다. 이렇게 풍양 조씨 가문은 조인영을 중심으로 세도를 누리던 중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 헌종이 친정을 시작하는 헌종 7년(1841)에 조인영이 영의정에 제수되면서는 안동 김씨 세도를 능가하였다.

풍양 조씨 가문의 정권 유지를 위한 일화가 한말 김택영이 지은 《한사경》에 수록되어 있는데 이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1843년 현종비인 김조근의 딸 효현왕후가 승하하자, 홍재룡의 딸이 현종비로 간택된 적이 있었다. 이가 효정왕후이다. 이때 풍양 조씨 가문의 일원인 조병현은 자칫 홍씨 가문과 권력이 분점되는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몰래 궁녀들에게 뇌물을 주어 효정왕후의 월경 일자를 알아내서 헌종으로 하여금 침실로 들도록 하였다. 이렇게 몇 차례를 반복하자 헌종은 효정왕후를 탐탁치 않게 여겨 이후로는 왕비의 침실로 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자 당시 정승인 권돈인이 헌종에게 나아가서 염려스러운 말투로 간하였다.

“전하께서는 어찌 종묘를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러나 헌종은 가납하지 않고 오히려 일어나서 내전으로 들어가버렸다. 정원용은 헌종을 따라가며 눈물로 간하기를 수차례, 그 눈물이 헌종의 어의를 적실 정도였으나 끝까지 헌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조병현의 계략이 먹혀들어갔던 것이며, 조병현은 이후 헌종 13년(1847)에 당시 주부 김재청(《한사경》에는 판서 김재찬으로 되어 있으나 오류로 보여 바로잡음)의 딸을 납비하여 경빈(慶嬪)으로 책봉토록 하였다.

헌종은 이렇게 할머니 집안인 안동 김씨와 어머니 집안 풍양 조씨의 세도 사이에서 국왕으로서의 입지를 다지려는 몸부림을 하였다. 물론 할머니인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던 시기는 여의치 않았다. 그러나 헌종 7년(1841) 친정이 시작된 후 왕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선왕인 정조와 순조가 효장세자의 《보감(寶鑑)》 편찬을 명하였다. 또한 헌종은 자신의 신변호위와 물리력 확보를 위해 군사제도로 정비하였다. 그리하여 설치한 것이 궁중에 설치한 내영(內營)과 총융청을 총위영으로 개편한 것이었다. 내영을 설치한 것은 헌종 12년(1846) 직전으로 보이는데, 이들은 국왕이 거둥할 때 측근에서 호위하였다. 그런데 이들이 1846년 1월 궁궐 내에서 소리지르면서 소란을 피우는 사건이 발생하여 문제가 되었다. 이제 영의정 권돈인은 끝까지 조사하여 처벌하자고 하였다.

“어제 듣건대, 무감(武監)들이 무리를 지어 대내(大內)의 아주 가까운 곳에서 소란을 일으켰다 합니다. 나라의 기강이 다시 여지가 없다 하더라도 수십 명이 떼지어 합문(閤門) 밖에서 소리지르고 소란을 일으켰으니, 이것은 실로 예전에 없던 변괴입니다.”

이어서 권돈인은 한낱 쓸모없는 무리들을 모아서 무엇에 쓰겠는가 하고 내영의 운영 자체를 반대하였다. 그러자 헌종도 이미 사단이 벌어진 이후였기 때문인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도 그런 뜻이 있지만, 이번 일이 일어난 뒤이므로 망설였다. 경(卿)의 말이 좋으니 윤허하겠다.”

이렇게 친위병력을 양성하려던 헌종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런 일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해 8월 5일 헌종은 다음과 같이 하교하였다.

“숙위(宿衛 : 당나라에 인접해 있는 군소국가의 왕자들이 당나라 궁정에 머무르면서 황제를 호위하던 의장대)의 소홀함이 근일보다 심할 수 없으니, 변통하지 않을 수 없다. 전에도 전례가 있었으니, 총융청(摠戎廳)을 고쳐 총위영(總衛營)으로 만들고, 번을 나누어 금중(禁中)에 입직(入直)하게 하여 숙위를 엄하게 하되, 모든 절목(節目)은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잘 마련하여 계하(啓下)하게 하라.”

즉 총융청을 총위영으로 고쳐 궐 내의 숙위를 담당케 하겠다는 것이었다. 헌종은 특히 이곳 총위영 소속 군사들을 대상으로 시사(試射) 등을 행함으로써 자신의 호위군사로서 육성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런 헌종의 의도를 간파한 신료들은 총위영 소속 병사들의 문제를 들어 비난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헌종은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세도가문의 틈 속에서 왕실의 권위와 왕권 강화를 위해 몸부림쳤으나 그도 결국 재위 15년 만에 후사 없이 창덕궁 중화당에서 승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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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집필자 소개

국민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사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후기 정치사를 전공했으며, 현재 국민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출처

이야기 조선왕조사
이야기 조선왕조사 | 저자이근호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조선왕조 500년의 인물과 사건을 대화 형식으로 서술한 <이야기 조선왕조사>. 조선의 역사를 '이야기식'으로 정리하면서 500년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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