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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사
계모의 핍박에도 효성 다한 인종
중종이 승하하자 법례대로 맏이인 인종(仁宗)이 등극하니, 그가 곧 조선조 제12대 왕이다. 인종은 장경왕후 윤씨의 소생인데, 그는 세상에 태어난 지 7일 만에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인 문정왕후 윤씨의 손에서 자랐다. 그런데 문정왕후는 늘 전실 소생인 인종의 가슴을 쓰리게 하였다. 그러나 효성이 지극한 인종은 어릴 때부터 참기 어려운 수모를 참고 견디면서, 매양 그 계모의 뜻을 잘 받들었다.
인종이 세자로 책봉되어 금성부원군 박용(朴庸)의 딸과 혼인한 것은 그의 나이 열 살 때의 일이다. 그가 아직 빈궁과 함께 동궁에서 거처할 때의 이야기다. 어느 날 밤, 막 잠이 들려 할 때, 별안간 동궁에서 불이 일어나더니 삽시간에 동궁이 불바다로 변하였다. 깜짝 놀라 깨어 일어난 세자는 빈궁을 향하여,
“내 전일에 죽음을 피하였음은 부모님께 악한 소문이 돌아갈까 두려워함이었거니와, 이제 밤중에 잠을 자다가 불에 타 죽었다면, 그럴 염려는 조금도 없을 것이니, 나는 피하지 않겠소. 어서 빈궁이나 피해 나가시오.”
하였으나 빈궁으로서도 사랑하는 남편을 두고 혼자 피해 나갈 수는 없었다. 더욱이 그와 같은 세자의 말을 듣고는 통곡하면서,
“저 혼자 살면 무얼하겠나이까?”
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이때 뜻밖의 불기운에 놀란 동궁의 시종들이 깨어 나와서 세자 내외에게 속히 피하시라 권하였으나 막무가내였다. 그들은 하는 수 없이 대전으로 뛰어들어가서 중종께 급함을 고하였다. 그런 줄 모르고 달게 자고 있던 중종은 이 불의의 보고에 황망하여 동궁으로 뛰어나갔다. 가서 보니 동궁은 벌써 불도가니였다. 중종은 왕의 위엄이고 무엇이고 돌아볼 겨를 없이 큰 소리로,
“백돌(伯乭)아! 백돌아!”
하고 부르짖었다. 백돌이는 세자의 아명이었다. 그때 방 안에서 조용히 앉아 죽기를 각오한 세자였으나, 이 애끓는 부왕의 울부짖음을 듣고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예, 나가겠나이다.”
하고는 빈궁과 함께 불꽃 속을 헤치고 나왔다. 그리하여 겨우 타죽기를 면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불은 정사(正史)에, 쥐 꼬리에 화선을 달아 여러 마리를 동궁으로 들여보내어 지른 불이라 했다. 물론 자나깨나 인종을 미워하고 없애려는 문정왕후가 그들 내외를 타 죽게 하려고 한 짓이다. 인종은 뛰어난 기상과 자질을 지녔을 뿐더러 슬기롭고 인자하기 비길 데 없었다.
그러나 항상 계모 문정왕후의 학대에 전전긍긍하며 지내었다. 중종이 승하한 뒤 그의 나이 30에 왕위에 올랐으나 일찍이 슬하에 일점 혈육(血肉)이 없었음은, 일설(一說)에 그가 계모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하여 왕위가 자연 그의 아우이자 문정왕후의 소생인 명종(明宗)에게 전승되도록 하려고 고의로 생산을 피했다는 말도 있다. 그가 등극한 뒤 명나라에서 사신이 나왔을 때, 경복궁에 나아가 맞이하는데, 중종이 거처하던 곳에 이르자 그는
“선왕이 거처하시던 곳……”
하며 말도 채 맺지 못하고 흐느꼈다. 명나라 사신이 역관에게 까닭을 물어 알고는,
“하늘이 낸 효자로다!”
하면서 감탄하기를 마지않았다 한다. 왕위에 오르자, 문정왕후 윤씨는 대비가 되었으나, 그 여장부 기질은 조금도 버리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더 심하여 인종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였다. 한 번은 인종이 문안을 드리러 대비전으로 갔더니 윤대비는 자기 소생인 명종을 앞에 앉혀 놓고,
“우리 모자가 전하의 손에 죽을 날이 멀지 않았지요? 언제쯤 죽이렵니까?”
하는 엄청난 말을 하였다. 왕은 기가 막혀 문 밖에 엎드려 대죄를 하였는데, 이런 일이 있기가 일쑤여서, 인종은 혹 자기의 효성이 부족함인가 하고 울기를 마지 않았다. 그런 노심초사가 쌓이고 쌓여 마침내 인종은 병을 얻었는데, 왕이 병석에 누워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대신이 왕의 병을 진찰하기 위해 의관을 데리고 들어왔다. 진맥을 해야 하겠으므로 궁녀가 왕의 손을 이끌어 받들려 하자, 왕은 손을 내놓지 않았다. 그때 인종의 외숙 되는 윤임이 옆에 있다가 왕의 뜻을 짐작하고 그가 손을 받들려 하매 그제야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평일에 몸가짐이 그만큼 엄정했던 그였다. 그러나 병은 더하여 스스로 회복하지 못할 줄 알자 그는 유언으로,
“내 병이 이렇게 중한데 대를 이을 아들이 없으니 경들은 나의 아우 경원대군을 세우고 힘써 보좌하여 주오. 또 조광조는 어진 선비였는데도 그렇게 억울하게 죽어 늘 내 마음이 쓰라렸소. 내 이제 마음먹은 바를 이루지 못하고 가니, 경들은 내 뜻대로 조광조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기 바라며, 또 거두어들인 현량과 홍패를 모두 돌려주기 바라오.”
하고 좌우에 있는 신하를 시켜 지필묵을 들이라 한 다음, 무엇을 쓰려 하다가 붓을 놓고 탄식하기를,
“나의 심중에 있는 말을 글로 써서 경들에게 알리려 하였더니 이제는 할 수가 없구나!”
이 한마디를 남기고 그는 숨을 거두었다. 인종, 그는 효성이 지극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하를 아끼고 백성을 사랑할 줄 아는 성군이기도 했다. 그는 올바른 말을 기꺼이 경청하였으며, 백성들의 어려움을 자신의 어려움처럼 알았기 때문에 연산군과 중종 때 빛을 잃은 국정이 다시 서광을 발하게 되었다. 인종이 승하하자 서울 사대부와 서민들이 흐느끼며 통곡하여 마치 자기 부모의 상사와 같았고 먼 지방이나 궁벽한 시골 유생으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양식을 싸가지고 와서 대궐 밖에서 우는 자가 계속 이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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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계모의 핍박에도 효성 다한 인종 – 이야기 조선왕조사, 이근호,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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