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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사
외로운 자리에 선 광해군의 시련
어렵게 등극한 광해군은 우선 선조 말년에 자신을 반대하고 영창대군을 지지했던 세력의 핵심인 유영경과 그 일당들을 제거하였다. 그리고는 얼마 안 되어서 선조의 승하와 자신의 왕위 계승을 알리고자 연릉부원군 이호민과 오억령 등을 중국에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조선은 건국 이래 중국과의 사대 질서에 편입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국왕이나 왕비의 승하나 책봉 등이 있을 경우는 중국에 사신을 보내 이를 통보하고 그에 합당한 조서 등을 받음으로써 정통성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의외의 소식이 전해졌다. 당시 명나라 조정에서 예과도급사중 호흔 등이 선조의 장자인 임해군 대신에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것에 이의를 제기하였다.
“그 나라는 본래 예의의 나라라고 일컫는데 어찌 자의로 장자를 폐하고 차자를 세워서 스스로 어지럽고 망할 계제를 만들 것입니까?”
그러자 이호민 등은 말하였다.
“맏이는 중풍으로 선조의 여막을 지키고 있다.”
“임해군이 이미 왕위를 사양하였다.”
그러자 중국 조정에서는
“여막을 지키고 있다면 병 중이 아닐 것이요, 다투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사양함이 있겠는가?”
하면서 이호민의 대답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이호민이 보낸 통사(通事)를 통해 명나라 조정에서 진행되는 급박한 이야기를 전달받은 조선 정부는 대책 마련에 부심하였다. 그러던 중 명나라에서는 요동도사 엄일괴와 자재주지주 만애민을 조선에 파견하여 사실 여부를 조사하도록 하였다. 조선에 도착하여 사신들이 머무는 객관에 여장을 푼 중국 관원들은 매우 불쾌하였다. 마땅히 이곳으로 와서 자신들을 맞이하여야 조선의 왕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중국 관원들은 접대를 위해 파견된 대신에게 호통을 쳤다.
“반드시 임해를 보아야겠다. 보지 않고 황제께 어떻게 아뢰겠는가?”
조선으로서는 난감한 일이었다. 사실 임해군은 그보다 얼마 전 선조의 병이 위중해졌을 때 사사로운 감정을 품고 군기를 저장하고 남몰래 결사대를 길러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고 하는 것이 고변되어 교동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에 중국 관원 접대를 위해 파견되었던 이원익 등은,
“우리나라의 예는 중국과 달라서 비록 평민이라도 상복을 입은 사람은 손님을 보려고 먼저 가지 아니하고, 임해는 외처에 나가 있는데 모역(謀逆)한 사람을 천조(天朝 : 즉 중국) 관원이 면대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아니합니다.”
변명하면서 임해군을 만나는 것만은 막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중국 관원들은 막무가내였다.
“임해를 성 밖에 데리고 오면 내가 마땅히 짐작할 것이고 왕위를 계승한 왕이 와서 보지 아니하면 대사가 무엇으로 완성되겠소. 상복으로 오는 것도 무방하오.”
재차 이렇게 말하며, 광해군이 올 것과 임해군을 만나도록 주선할 것을 요청하였다. 난감해진 조선의 대신들은 이 사신을 광해군에게 보고하였다. 더 이상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감지한 광해군은 사신들이 머무는 곳으로 가서 중국 관원들을 맞이하는 예를 치렀다. 또한 교동에서 유배생활하던 임해군은 배를 타고 한강의 서강 나루에 도착하여서는 일부러 미친 척하면서 중국 관원들을 보고 돌아갔다. 이때 정인홍 같은 인물은 임해군의 머리를 베어 중국 관원에게 보이자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사실 정인홍의 주장과는 다르지만 임해군은 다음해인 광해군 1년(1609) 이이첨 등의 사주에 의해 교동현감 이직의 손에 죽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왕대비가 명령을 내려 3정승이 조정의 문무관리들을 데리고 중국 관원에게 가서 글을 올려 임해군이 왕통을 잇지 못한 이유를 진술하도록 하였다. 이밖에 신득연이 중심이 된 성균관 유생과 서울 시전 상인들도 글을 바쳤다. 그리고 중국 관원들에게 일을 잘 무마해달라는 조건으로 은과 인삼 등을 뇌물을 주었다. 당시 기록에는 중국 사신에게 뇌물을 준 것이 이때부터 처음 시작되고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또한 이덕형 등을 명나라에 보내 왕대비 명의 주문(奏文)을 전달하는 등 다양한 채널로 이 문제를 수습하려고 하였다.
그 결과 광해군 1년(1609) 3월 중국 명나라 황제는 웅화를 보내 선조에게 제사를 내리고 시호와 부의를 하사하였고, 또 태감 유용을 보내서 광해군을 왕으로 책봉하는 조서를 내렸다. 중국 황제의 조서를 받은 후 광해군은 이어서 세자를 책봉하는 한편 다음해에는 자신의 생모인 공빈을 추존하여 공성왕후(恭聖王后)라 하고 무덤을 성릉(成陵)이라고 하는 등 왕실을 정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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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외로운 자리에 선 광해군의 시련 – 이야기 조선왕조사, 이근호,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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