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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야기 조선
왕조사
규장각과 문예 르네상스

정조의 신진 양성

정조는 즉위 직후에 자신의 즉위를 반대하던 여러 세력들의 음모에 시달렸다.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고 결국 정조는 제자리를 찾아갔다. 이 와중에서 즉위 초 자신을 도왔던 홍국영을 제거해야만 하였다. 정조는 이렇게 한편에서는 자신에게 몰려드는 반대세력의 음모를 분쇄해야 하였고, 다른 한편으로 이를 막아가면서 자신을 지지할 세력을 육성해야만 하는 정치적 고심이 있었다. 후자를 위해 창덕궁 후원 북쪽에 설립한 것이 규장각이었다. 규장각이란 명칭은 정조 때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조선 전기 세조 때 양성지가,

“군상(君上)의 어제(御製)는 운한(雲漢)과 같이 하늘에 밝게 빛나니 만세토록 신자(臣子)는 마땅히 존각(尊閣)에 소중히 간직할 바이기 때문에, 송조(宋朝)에서 성제(聖製)를 으레 모두 전각을 세워서 간직하고 관직을 설치하여 관장하게 하였습니다. 원하건대 신 등으로 하여금 어제 시문(詩文)을 교감하여 올려서 인지각(麟趾閣) 동쪽 별실(別室)에 봉안하되 규장각(奎章閣)이라 이름하고, 또 여러 책을 보관한 내각(內閣)은 비서각(秘書閣)이라 이름하소서.”

하여 국왕들의 글인 어제를 보관하기 위해 규장각 설치를 제안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양성지의 건의는 시행되지 않았다. 이후 숙종 때 이르러 앞선 선왕들의 어제 등을 봉안하기 위하여 별도로 종정시(宗正寺)에 작은 누각을 세우고 이곳의 현판을 ‘규장각’이라 하였던 적이 있었으나 지속되었는지 알 수 없다.

정조가 즉위한 후 선왕의 어제를 편집하여 편찬한 후 임시로 보관하다가, 대신들을 불러서 창덕궁 후원에 이를 보관하기 위한 전각을 세우도록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시작된 공사는 약 6개월이 소요되어 1776년 9월에 완성되었다. 이때 완성된 누각은 2층으로 처음에는 ‘주합루’라는 현판을 달았다가 뒤에 숙종조의 현판인 규장각을 옮겨 달았다. 규장각의 ‘규(奎)’는 별자리 28수의 하나로서, 중국에서는 황제의 어필을 규장이라고 하였다. 그만큼 규장각은 왕권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이었다.

규장각 소속 신하들은 원래 다른 관직을 겸하지 못하도록 하였다가 정조 5년(1781)부터는 이런 제한 조치들이 해제되었다. 이들에 대한 정조의 대우는 매우 유별나서,

“교외(郊外)에 동가(動駕)할 때에 승지에게 말을 주는 것이 이미 정식으로 되어 있는데 옛날 규례에 별군직(別軍職)에도 또한 동가 때에 내구(內廐)에서 말을 주었는데 더구나 예로 높여야 할 곳이겠는가? 이 뒤로는 성(城) 안이나 성 밖으로 동가할 때에 규장각 제학·직제학·직각·대교 등 관원은 비록 본직(本職)의 반열에 있더라도 내구마(內廐馬)를 타도록 허락한다.”

한다는 하교를 내린 적도 있었다.

《흠휼전칙》

1778년 형구(刑具)의 규격 및 품제를 정해 준행하도록 조처한 율서(律書). 1777년 정조는 당시 형구의 격식이나 조율(照律)이 일정하지 못함을 지적하고 여러 대신들에게 이를 바로잡도록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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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한 의도를 알 수 있게 하는 정책이 규장각에서 주관한 초계문신제였다. 초계문신제란 37세 이하 연소한 하급 관리들 중에서 과거 급제 후 승문원에 임시로 소속된 관리들 가운데 능력있는 자를 의정부에서 뽑아 40세까지 교육시키는 제도였다. 이들 문신들의 교육을 담당하던 곳이 규장각으로, 규장각에서는 매월 초하루에 이렇게 선발된 관리들을 시험 보아 그 성과를 가렸다.

정조는 또한 이들의 교육적 실효를 위하여 실직에 있는 경우는 그 근무를 제외시켜 주는 등 많은 혜택을 부여하였다. 정조가 이렇게 이들에 대해서 많은 특혜와 혜택을 주었던 것은 결국 이곳을 자신의 통치기반으로 하려고 하였던 것이며, 초계문신제를 통해서 선발된 인원들을 자신의 친위세력을 양성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아래에 참고적으로 규장각 검서관을 지낸 이덕무가 노래한 규장각 8경 가운데 하나를 옮겨보겠다.

새로 지은 규장각 높고 높은데
허다한 좋은 문장 이미 보았네.
길사들이 모여드니 역복(더부룩한 나무)을 생각하고
영재가 진작되니 청아(무성한 쑥)를 읊네.
한나라는 현량책을 시행하였고
당나라는 때로 박학과를 열었네.
난봉의 풍채 갖춘 사람 그 누구인가?
요사이 밝은 조정에서 예로 맞아들이네.
규장각

조선시대 왕실의 도서관이면서 학술 및 정책을 연구한 관서이다. 정조 즉위년 3월에 궐내에 설치되었다. 역대 왕들의 친필, 서화, 고명(顧命), 유교(遺敎), 선보(璿譜) 등을 관리하던 곳이었으나 차츰 학술 및 정책 연구기관으로 변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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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 정조의 이러한 학문 진흥 노력은 결과적으로 정조대에 많은 서적들이 간행되면서 서구의 르네상스에 준하는 문예 르네상스를 맞이하였다. 그리하여 정조가 직접 주관해서 만든 책만도 약 2,400여 권에 육박하며, 이밖에도 많은 책들이 편찬되었다. 대표적인 것 몇 종을 나열해보면 정법서로 《흠휼전칙》과 《자휼전칙》, 《대전통편》 등이, 무예와 군사 관련서적으로 《병학통》과 《무예도보통지》, 문장관련 서적인 《팔자백선》, 《문원보불》이 간행되었다.

음악 관련서적으로 《악통》, 《율려신서》 등이, 성리학 관계서로 《주서백선(朱書百選)》과 《존주록》 등과 이순신의 문집인 《이충무전서(李忠武全書)》를 비롯해 《오륜행실(五倫行實)》과 《향례합편(鄕禮合編)》 등이 간행되는 등 새롭게 문운(文運)이 일어났다. 정조의 이러한 노력은 정조가 표방한 학문정치의 결과이며, 이를 통해 정조는 새로운 군주상을 제시하면서 자신이 통치자로서 군주를 넘어서 만백성에게 스승이 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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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집필자 소개

국민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사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후기 정치사를 전공했으며, 현재 국민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출처

이야기 조선왕조사
이야기 조선왕조사 | 저자이근호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조선왕조 500년의 인물과 사건을 대화 형식으로 서술한 <이야기 조선왕조사>. 조선의 역사를 '이야기식'으로 정리하면서 500년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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