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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면 국가의 면모를 일신하기 위해 여러 가지 정책을 추진하는 법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수도 천도이다. 우리나라의 역사상 고려의 태조 왕건이 고려를 세운 후 이전 태봉의 수도인 철원에서 개성으로 도읍을 옮긴 것이 그것이며, 중국 역사에서 보더라도 원(元)나라를 대신해 중국의 주인이 된 명나라 역시 원의 구도(舊都)인 연경(燕京, 북경)을 수도로 하지 않고 금릉에 새 수도(남경)를 정하였다.

조선왕조 역시 건국 직후인 태조 원년(1392) 8월에 도평의사사에 명하여 한양으로 천도할 것을 명하였다. 그리고는 다음날 삼사우복야 이염(李恬)을 한양부로 보내어 궁실을 수리하도록 하는 등 실제 천도 준비를 하기도 하였다. 물론 한양으로 천도가 쉬웠던 것은 아니었다. 이에 대한 반대도 만만치 않았으니, 태조는 반대의 뜻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태조

태조(조선)의 영정, 전북 전주시 경기전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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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는 세가거족(世家巨族)들이 모두 싫어하므로 이것을 빙자하여 중지시키려는 것이다. 재상들이 오랫동안 송경(松京)에 살아서 안토중천(安土重遷 : 고향에서 눌러 살기를 바라고 다른 곳으로 떠나기를 싫어함) 하니 천도하는 것이 어찌 그들의 뜻이겠느냐?”

태조의 천도 결심은 이미 확고하였다. 그러나 반대를 무조건 제압하고 일을 치른다는 것은 새 왕조 건국 초기의 상황에서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천도에 대한 논의는 잠시 추춤하다가 다음해인 태조 2년(1393) 1월에 다시 거론되었다.

천도 논의가 다시 제기되면서 도읍지로 거론된 곳은 한양이 아니라 계룡산 아래였다. 앞선 겨울에 왕실의 태(胎)를 봉안한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양광(楊廣)(경기·충청도)·경상도·전라도에 나갔던 권중화가 돌아와서 계룡산 도읍도를 올린 것이 계기가 되었다. 권중화가 올린 도읍도를 본 태조는 새로운 도읍지로 계룡산에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 이어 계룡산에 거둥할 테니 준비토록 명하였다.

계룡산 신도안 주초석

신도안의 부남리·정장리·석계리 일대에 흩어져 있는 주춧돌로, 처음 수도로 결정되어 궁궐을 지을 때 옮겨 놓은 것이다. 두 개를 제외하고 원래 있었던 92개는 현재 그대로 있으며 석재를 가공한 흔적이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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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란·남은·무학 등과 함께 계룡산에 도착한 후 주위를 살펴본 태조는 만족스러웠던지 며칠 후 김주 등의 관원을 현지에 남겨 놓고 돌아오면서 새로운 도읍지를 건설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새로운 수도 공사는 약 10개월이 지났을 때 난관에 봉착하였다. 당시 경기도관찰사 하륜이 계룡산이 수도로서 적합하지 않다는 주장을 하고 나선 것이었다.

“도읍은 마땅히 나라의 중앙에 있어야 될 것이온데, 계룡산은 지대가 남쪽에 치우쳐서 동면·서면·북면과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또 신이 일찍이 아버지를 장사하면서 풍수관계의 여러 서적을 대강 열람했사온데, 계룡산의 땅은, 산은 건방(乾方)에서 오고 물은 손방(巽方)에서 흘러간다 하오니, 이것은 송(宋)나라 호순신(胡舜臣)이 이른바, ‘물이 장생(長生)을 파(破)하여 쇠퇴함이 곧 닥치는 땅’이므로, 도읍을 건설하는 데는 적당하지 않습니다.”

하륜의 주장을 들은 태조는 계룡산에 도읍을 건설하는 공사를 중단하게 하고, 정도전·남재 등 당시 재상들에게 다시 조사하여 아뢰도록 하였다. 일설에는 계룡산 아래에 터를 보아 공사를 시작한 후 태조가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한 신인(神人)이 나타나,

“이곳은 바로 전읍[奠邑, ‘정(鄭)’ 자의 파자(破字)]이 의거할 땅이지 그대의 터가 아니니, 머무르지 말고 빨리 가라.”

하고 말해서 계룡산 천도를 중단하였다고도 한다. 여기서 전읍, 즉 ‘정’ 자는 아마도 정도전을 가리키는 듯하다. 계룡산의 수도 건설 공사가 중단된 후 새로이 수도로 거론된 곳이 오늘날 서울시 서대문구 연희동·신촌동 일대에 해당되는 무악(毋岳)이었다. 누가 무악을 새로운 도읍지로 천거했는지 정확하지 않지만, 일설에 하륜이

“도선의 비기에 ‘한수(漢水)가 명당(明堂)에 들어온다’ 하는 말이 있으니, 무악의 남쪽에 세우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주장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새롭게 거론되던 무악에 대해 권중화와 조준 등은

“무악 남쪽은 땅이 좁아서 도읍을 옮길 수 없습니다.”

하고 반대하였고, 지사인 윤신달·유한우 등도 적합하지 않다 하여 반대하였다. 태조로서는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심경을 태조는,

“서운관이 전조 말기에 송도의 지덕이 이미 쇠했다 하고 여러 번 상서하여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자고 하였다. 근래에는 계룡산이 도읍할 만한 땅이라고 하므로 백성을 동원하여 공사를 일으키고 백성들을 괴롭혔는데, 이제 또 여기가 도읍할 만한 곳이라 하여 와서 보니, 유한우 등이 좋지 못하다 하고, 도리어 송도 명당이 좋다고 하면서 서로 논쟁을 하여 국가를 속이니, 이것은 일찍이 징계하지 않은 까닭이다.”

하며 매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수도 이전 문제는 이제 다시 원점에서 논의하여야만 하였다. 일이 이렇게 어렵게 되자 태조는 무엇인가 결심하였던지 송도로 돌아가서 소격전(昭格殿)에 나아가 기도하고서 결정하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바로 송도로 돌아가지 않고 남경(지금의 서울)에서 머물게 되었다. 남경에서 머무는 동안 태조는 일행들과 함께 고려시대 남경의 궁궐 옛터를 돌아보고는, 이곳은 어떠냐고 주위에 있는 신하들에게 물었다. 그 자리에 있던 윤신달은

“우리나라에서 송경이 제일이요, 이곳이 그 다음입니다. 유감인 것은 건방(乾方)이 저하(低下)하고 수천(水泉)이 마른 일입니다.”

하여 찬동의 의사를 표시하였다. 윤신달의 찬성 의사를 청취한 태조는 다시 무학에게 문의하였다. 무학 역시 큰 반대를 하지 않았다. 이어 태조는 다시 주위에 있던 재상들에게 의사를 물었는데, 대체로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이렇게 해서 우여곡절을 겪은 후 비로소 한양이 조선왕조의 새로운 수도로 결정되게 되었다. 때가 태조 3년(1394) 8월 13일이었다. 이로써 조선왕조 5백 년의 수도이자 오늘날도 여전히 수도인 서울이 역사의 중심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도성도〉

정조 연간에 제작된 지도책인 《여지도》에 수록된 서울 지도이다.

ⓒ 서울대학교 규장각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일설에는 한양으로 수도가 결정된 후에도 태조의 왕사인 무학과 태조의 책략가인 정도전 사이에 논란이 있었다고 전한다. 무학의 경우 태조가 ‘도읍으로 정할 땅이 어디가 좋겠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인왕산(仁王山)으로 뒤는 진산(鎭山 : 도읍의 뒷쪽에 있는 큰 산)을 삼고, 백악·남산이 좌우의 용호(龍虎)가 되어야 합니다.”

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국왕의 거처는 동향을 하게 된다. 그러자 정도전이 이에 반대하면서 말하였다.

“예로부터 제왕은 모두 다 남면하여 앉아 다스렸으니, 동향을 하였다는 말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정도전의 반대로 자신의 의견이 관철되지 않자 무학은

“내 말을 따르지 않으면, 이후 2백 년에 걸쳐 반드시 내 말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신라 의명대사(義明大師)가 일찍이 말하기를, ‘한양에 도읍을 택할 적에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시비를 건다면 곧 5세(五世)를 지나지 못해서 왕위를 찬탈당하는 화가 일어날 것이며, 2백 년 만에 전국이 혼란스러운 난리가 올 것이라’ 한 말이 있습니다.”

하였다고 한다. 무학의 말에 따르면 5세가 지나서 왕위를 찬탈당하는 화란 수양대군의 계유정란을 말하는 것 같고, 2백 년 만에 혼란스러운 난리란 임진왜란을 말하는 것 같다. 마치 미래를 예언하는 말 같았지만 이를 모두 다 믿을 수는 없다.

서울로 수도가 결정된 후 한때 개경으로 다시 천도했다가, 몇 년 후 다시 서울로 옮긴 일이 있기도 했다. 천도 후, 5~6년 만인 정종 원년(1399)에 제1차 왕자의 난을 치른 후 갑자기 새로운 도읍지를 버리고 도로 구도 개경으로 이어(移御 : 임금이 거처를 옮기는 것)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그러나 정종 2년에 개경에서도 이른바 제2차 왕자의 난이 발생하고, 정종이 세제로 책봉된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되는데, 왕위에 오른 태종은 다시 부왕 태조의 뜻에 따라 왕위에 오른 지 5년 만에 한양으로 다시 천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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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집필자 소개

국민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사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후기 정치사를 전공했으며, 현재 국민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출처

이야기 조선왕조사
이야기 조선왕조사 | 저자이근호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조선왕조 500년의 인물과 사건을 대화 형식으로 서술한 <이야기 조선왕조사>. 조선의 역사를 '이야기식'으로 정리하면서 500년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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