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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야기 조선
왕조사

임술고변과 노∙소론의 분당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정권을 잡은 후 조정은 경신환국 직후에 책록된 보사공신의 정당성 여부를 놓고 논란이 있었다. 이런 와중인 숙종 7년(1681) 감시(監試)가 시행되었는데, 이때 제출된 시험 답안지인 시권에서 피봉(皮封)에 아무것도 쓰지 않은 시권이 하나 제출되었다. 피봉이란 과거 응시자의 사조(四祖 : 증조·조·부·외조) 등을 기록한 후 봉하는 것을 말한다. 이상하다고 여긴 시관이 이를 펴보니 그 내용은 역모를 고변한 글로서, 남인과 관련된 것이었다. 시관들은 당황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다. 한 시관은,

“익명서를 발표하는 것은 법에 저촉되는 것이니 불태워버려야 한다.”

하였고, 다른 시관은 말하였다.

“불태워 버릴 수 있는 것은 통상적인 일에 대한 것이다. 이 글이 만약 헛말이 아니라면 국가의 화를 어찌하랴.”

시관들은 설왕설래를 하다가 결국 왕에게 올리기로 하였다. 보고를 받은 숙종은 이를 바로 공개하지 않고 김석주를 불러 사실을 조사하도록 하였다. 이에 김석주는 이 사실을 드러내놓지 않고 정탐하기로 하고, 김환이라는 자를 사주하였다. 김환은 무인으로 본래는 서인의 당색을 가지고 있다가 남인이 정권을 잡은 후 여기에 붙어 관직을 얻는 자였다. 그런 때문에 김석주의 판단에는 남인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김석주는 김환을 불러 말하였다.

“나라에 큰 변이 있는데 알아낼 방도가 없으니 네가 잘 정탐하여 고하라.”

그런데 김환이 처음에는 그럴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그러자 김석주는 김환에게 협박하였다.

“만일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너를 베어 죽이리라.”

김환도 더 이상은 김석주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그렇게 하겠다고 하고는 그 방법에 대해서 문의하였다. 그러자 김석주는 말하였다.

“지금 허새와 허영의 집이 용산에 있으니 네가 피접한다고 이유를 대고 그 이웃에 머물면서 교제를 하되, 서로 친해지게 된 뒤에 장기를 두다가 승패가 결정될 쯤에 네가 남의 나라를 빼앗는 것과 마땅히 이러 하리라고 말하면 그의 기색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이를 통해서 이상한 사실을 발견하지 못하면 밤에 동침하면서 이들에게 역모를 같이 하자고 꾀어 그 사실 여부를 밝혀보라고 하였다. 김환은 김석주의 지시대로 실행에 옮겼다. 김석주는 또한 김환에게 유명견도 조사하도록 하고는, 유명견과 친척이 되는 전익대를 소개시켜 주었다. 김환과 전익대 등에게 역모 사실을 정탐하게 하였던 김석주는 얼마 후 청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김석주는 내심 걱정이었다. 자기가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면 그 동안 추진했던 일이 허사로 돌아갈 줄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김석주는 청나라로 가면서 김익훈에게 이 사실을 전하고 자기 일을 맡아서 처리하도록 하였다. 김석주로부터 청탁을 받은 김익훈은 김환에게 빨리 유명견의 역모 사실을 알아보도록 재촉하였다. 전익대를 통해 유명견을 정탐하던 중이라, 김환은 전익대를 불러 그 사실을 물으니, 전익대는 말하였다.

“수상한 일로서 갑옷과 활을 만드는 듯한 기미는 있으나 실상 확실한 정보는 없다.”

이렇게 아직 남인 측의 움직임에 대해서 정확한 정보를 파악하지 못하던 상황에서 오히려 김환이 반역을 도모한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하였다. 일이 다급하게 진행되자 김익훈은 김환을 불러 빨리 고변하게 하였다. 김환도 일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전익대와 함께 고변하자고 하였으나, 전익대는 아직 구체적으로 들어나지 않는 사실을 고변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김환은 할 수 없이 자기 혼자서 고변하기로 하고, 김익훈에게 가서

“내가 들어가서 고변하고 국청을 설치한 뒤에 익대를 불러서 그 일을 물을 터이니 익대를 가두어 놓고 기다리기를 원합니다.”

하여 전익대를 가두고 기다려주기를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김환은 숙종 8년(1682) 10월 21일 자신과 이회·한수만 등과 연명으로 허새와 허영·이덕주 등이 복평군을 왕으로 추대하는 역모에 가담했다고 고변했다. 이렇게 김환으로부터 시작된 고변은 다음 다음 날인 10월 23일에 김중하가 민암·권환·윤유중과 종친 낙서령 이수윤 등이 김석주와 남두북·박빈 등 경신환국에 공이 있는 자를 제거하려 한다는 고변으로 이어졌다. 10월 27일에는 김익훈이 허새와 유명견 등의 역모를 조사하기 위해 김환과 전익대를 함께 심문하자고 하는 계를 올렸다.

숙종 글씨

숙종이 공주, 왕자, 신하들에게 내린 친필 시문을 음각하여 간행한 어필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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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된 고변을 조사하기 위해 국청이 설치되어 조사가 진행되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모두 무고한 고변이었다는 사실로 판정되어 김환은 옥에 갇혔다. 금번 고변이 무고로 드러나자 그 책임 소재를 두고 김익훈에게 대간들의 탄핵이 이어졌다. 대간들은 계속해서,

“김익훈이 공과 상을 탐하여 사람을 협박해서 남을 무고하게 함으로써 스스로 고변한 우두머리가 되었다.”

하며 그의 파직과 처벌을 요구하였다. 젊은 대간들의 요구가 계속되자 숙종은 여주에 머물고 있던 서인의 영수 송시열을 불러들이도록 하였다. 송시열의 의견을 물어 결정하려는 것이었다. 이에 승지 조지겸이 왕명을 받아 여주의 송시열에게 갔다. 여주에 도착한 조지겸은 며칠 송시열과 같이 머물면서 그간의 일들을 자세하게 말하였는데, 이때 송시열은

“고약한 짓이다. 비록 죽어도 애석하지 않다.”

하였다. 송시열이 이 같은 발언을 했다는 소리가 알려지자 젊은 대간들은 송시열의 견해가 자신들과 같다고 하여 매우 고무되었다. 그런데 송시열은 서울로 입성한 후 생각이 바뀌었다. 서울로 입성한 송시열은 재상의 위치에 있던 김수항·민정중·김석주 등에게 그간의 일들을 자세하게 물었다.

그러자 이들은

“김익훈의 죄는 다만 김환에게 경솔히 고하게 하여 그 실정을 다 캐내지 못한 것에 있다.”

하는 대답을 들었다. 그러자 송시열은

“그렇다면 김익훈이 무고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다만 가벼운 벌을 주는 것이 옳다.”

그렇게 대답하고는 숙종 앞에 가서는 김익훈은 자신의 스승 김장생의 손자인데 자신이 잘 계도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 변명하였다. 이후 시간이 경과하면서 김익훈의 처벌을 두고 논란이 계속되었다. 박세채를 비롯해 언관을 중심으로 한 젊은 관리들은 강경한 처벌을 주장한 반면 송시열을 비롯해 연로한 관리들은 그의 처벌을 반대하였다. 이렇게 집권서인들은 김익훈의 처벌 문제 등으로 대립하게 되었는데 후일 전자는 소론으로, 후자는 노론으로 당색을 같이 하게 되었다.

김익훈이 문외출송의 명을 받았다가 이것이 풀리자 노론과 소론이 대립이 더욱 격화되었다. 이러는 와중에 김석주가 깊숙이 관여하게 되었다. 김석주는 강경한 소론들의 논의를 잠재우기 위해 소론의 선봉에 나서서 자신들을 공격한 조지겸·오도일·한태동·박태유·신완 등 이른바 5간(諫)을 파직 또는 지방관으로 전보시키도록 하였고, 소론 측의 영수격인 박세채도 비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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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집필자 소개

국민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사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후기 정치사를 전공했으며, 현재 국민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출처

이야기 조선왕조사
이야기 조선왕조사 | 저자이근호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조선왕조 500년의 인물과 사건을 대화 형식으로 서술한 <이야기 조선왕조사>. 조선의 역사를 '이야기식'으로 정리하면서 500년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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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임술고변과 노∙소론의 분당이야기 조선왕조사, 이근호,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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