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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야기 조선
왕조사

조명연합군의 활약과 행주대첩

관군의 무력함에 대신해 의병과 수군의 활약이 눈부시게 전개되던 즈음, 명나라에서는 우리 측의 요청에 따라 그해 6월부터 명나라의 원병이 도착하였다. 두 차례로 나누어서 도착한 명나라 원군은 1차 원군인 조승훈이 이끄는 부대가 평양전투에서 패배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명나라 조정에서는 유격장군 심유경을 일본군 진영에 보내 그들의 의중을 탐색하고 강화를 하고자 하였다. 이러는 사이 이여송이 이끄는 2차 원정군이 도착하면서 전열을 재정비하였다. 이여송은 일본군을 공격하기에 앞서 일단 시간을 벌기 위해 선조 26년(1593) 1월 1일 사대수를 순안에 있는 일본군에게 보내면서,

“중국 조정에서 이미 화친하기를 허락하였고 심유격 또한 도착하였다.”

하고 일단 속여 말하도록 하였다. 그러자 일본군이 기뻐하였는데, 그때 출정하였던 일본 승려 현소(玄蘇)는 그에 화답하여 다음의 시를 지어 보냈다.

부상(扶桑 : 일본을 지칭)이 전쟁을 쉬고 중국에 복종하니
사해와 구주가 한 집안 같도다.
즐거운 기운은 도리어 우주의 눈을 녹이고
건곤(乾坤)에 봄은 이른데 태평의 꽃이 피었네.

어쨌든 이렇게 해서 시간을 번 이여송을 중심으로 한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은 평양성을 공격, 대승을 거두었다. 평양성에서 일본군을 격퇴한 조명연합군은 계속해서 남진하여 벽제에서 일본군과 결전하였다. 당시 일본군은 평양에서 대패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일본군과 함경도에서 쫓겨 내려온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군대가 합류하여, 그 군세가 상당히 컸다. 이여송은 평양성의 전투를 자만해서였는지 일본군을 무시하고 있다가 그들의 기습을 받고 일단 개성으로 후퇴하였다. 이때 관군을 이끌고 남하하는 명군과 호응하여 도성을 회복하려고 서울 부근에서 외로이 적군과 싸워 대첩을 거둔 이는 전라감사 권율(權慄)이다.

권율은 선조 26년(1593) 2월에 서한강변 행주산성에서 배수진을 치고 대적을 맞아 고군분투 끝에 대승을 거두었다. 권율은 전란 초에 광주목사로서 군사를 일으켜 싸웠는데, 진산 배고개에서 대첩하여 드디어 전라도 순찰사가 되었다. 이어서 군사를 이끌고 북상하여 수원 독산성에 웅거, 명군과 계책을 세워 서울을 회복하려다가 이여송이 벽제관 싸움에서 패퇴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으로 이동하였다. 행주산성은 강 안에 우뚝 솟아 있는 외로운 산으로 한쪽은 강에 직면하고 그 외에는 광막한 평야로 둘러싸여 있고 동쪽은 준험하고 서북 측은 완만하였다. 이때 병사 선거이(宣居怡)가 군사 4천여 명을 이끌고 금천(시흥)에서 응원하게 되고 창의사 김천일은 강화에서 해안으로 출진하고 충청감사 허항(許項)은 통진에서 응원을 하기로 하였다.

행주산성 토성의 일부

경기 고양시 덕양구 행주동(幸州洞)에 있는 삼국시대의 토축 산성이다. 정확한 축성연대와 목적은 알 수 없으며,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이 대첩을 이룬 싸움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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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율 자신이 인솔하는 군사는 1만여 명에 불과하였으나 도망갈 길이 없는 험지에 웅거하였으므로 결사의 용기를 품고 있었다. 이때 일본군은 벽제관 싸움에서 이미 대승을 거두었고, 군세의 성대함을 믿고 있는 터라 교만해져서 일거에 이 산성을 빼앗고자 2월 12일 새벽에 부대를 나누어 총병력 3만여 명으로 습격하여 왔다. 홍백기, 황금산, 귀면수형(鬼面獸形), 기타 형형색색의 괴이한 분장과 장식을 하고 들을 까맣게 덮어오는 왜군의 모습은 장관이었다. 산성은 겹겹으로 포위되었다.

조선군은 권율의 지휘 아래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적군이 가까이 육박해 오기를 기다려 화살과 돌을 우박같이 퍼부었다. 또 각종 총기를 발사하여 일본군에게 큰 손해를 입혔다. 그러나 일본군은 잠시도 주저하지 않고 계속 공격하였다. 적군의 함성과 총소리는 천지를 진동하고 또 그 탄환은 비오듯 쏟아져 방어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때 권율은 친히 물통을 들고 다니며 병사들의 목마름을 달래 주었다. 이 싸움에는 부녀자들까지도 총동원하여 앞치마로 돌을 날라다 주고, 물을 끓이고 하여 싸움을 도왔다. 이때부터 부녀자들이 앞에 두르는 치마를 행주치마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일본군은 온종일 진퇴를 거듭하다 불리해지자 마지막으로 마른 풀을 묶어 거기에 불을 질러 성책을 태우려 하였다. 그러나 성에서는 물을 끼얹어 이를 껐다.

행주산성 충장사

1970년 행주산성 정화작업 과정에서 건립된 것으로, 권율을 모시는 사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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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승장 처영(處英)을 시켜 승병 1천 명을 거느리고 서북쪽 외성을 지키게 하였는데 이때 왜군이 고함을 지르며 돌격해 들어와 승병이 그만 내성으로 쫓겨 들어왔다. 그러자 권율은 칼을 빼어 들고 앞장서서 달려가 왜병을 베며 제장을 독전하니, 우리편 군사들은 모두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다. 그리하여 왜적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대패하여 달아났다.

이때 적은 후퇴하면서 자기편 군사의 시체를 쌓아놓고 불태운 후 돌아갔는데, 타는 냄새가 십 리 밖에까지 뻗쳤다 한다. 승리한 우리편 군사들도 달려나와 즉시 적군의 시체를 수습하여 수급(首級) 130여 두를 얻고 적군의 활과 기갑, 조총 등 720점을 노획하였다. 이 전투에서 적의 대장 우키다 히데이에, 요시가와 히로이에[吉川廣家],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등까지도 부상을 입었고 나머지 장졸의 사상자는 부지기수요, 죽은 자만도 태반이었다 하니 이 얼마나 큰 격전이며 통쾌한 승첩이랴.

이 무렵 이여송의 명군은 개성에서 장차 서울을 칠 기세였다. 행주산성에서 대승한 권율 등이 거느리는 조선군은 고양, 파주 등지에서 일본군의 보급로를 끊었으며, 이순신의 수군은 해상에서 일본 수륙군의 연락을 불가능케 하여 전세는 차츰 일본군에게 불리해졌다. 여기에 사대수(査大受), 이여매(李如梅) 등 명나라 장수와 조선 대신 유성룡은 은밀히 군사를 이끌고 용산에 쌓아둔 적의 군량 10만 석을 모두 불질러버렸으므로 일본군은 더욱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전염병까지 유행하여 죽는 자가 부지기수였으므로, 그들은 하는 수 없이 서울을 버리고 남쪽으로 퇴각했다. 왜군은 완전히 철수하여 남쪽 해안 지대에 진을 쳤다.

벽제관지

벽제관은 한양으로 오가는 길목에 세워서 중국의 사절들을 머물게 하였던 곳이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 사적 제14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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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집필자 소개

국민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사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후기 정치사를 전공했으며, 현재 국민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출처

이야기 조선왕조사
이야기 조선왕조사 | 저자이근호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조선왕조 500년의 인물과 사건을 대화 형식으로 서술한 <이야기 조선왕조사>. 조선의 역사를 '이야기식'으로 정리하면서 500년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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