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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사
대마도 정벌
왜구는 고려말부터 우리의 해안을 오가며 약탈을 일삼아 이로 인한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왜구의 약탈은 조선 초까지 이어졌는데, 세종 1년(1419)에는 왜구 선박 3천여 척이 충청도의 비인과 황해도의 해주 등지에 들어와 약탈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때 우리의 해안 경비는 매우 허술하였다. 충청도의 비인으로 들어오는 곳에 도두음곶이 있었는데, 이곳 만호(萬戶) 김성길은 술에 취해서 저항하지 못한 채 스스로 물에 뛰어들었고, 그의 아들이 힘껏 싸우다가 빠져 죽는 일이 있었다. 이에 상왕으로 물러나 있던 태종과 세종은 이들을 막을 계책을 논의하면서 유정현·조말생 등을 불러서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저들의 빈틈을 타서 대마도를 섬멸하고 적이 제 소굴로 돌아가는 것을 맞아서 칠 계책을 의논하라.”
이 지시가 내려지자, 대부분은 빈틈을 타서 공격하기보다는 왜구들이 돌아갈 때를 기다려서 공격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유독 조말생만은,
“빈틈을 타서 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고 상왕 태종도 조말생의 의견에 찬동하였다.
“만일 그들을 소탕하지 않으면 매양 침략을 당할 것이니, 옛날 한 고조(漢高祖)가 흉노(匈奴)에게 욕을 본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저들의 빈틈을 타서 치고, 그 처자들을 잡아가지고 제주로 군사를 돌려 적이 돌아가는 것을 기다려 다시 맞아 공격하여 그들의 배를 빼앗아 불사르고, 장사하러 온 자들과 배에 남아 있는 자들을 아울러 구속하되 명령을 거역하는 자가 있으면 모두 무찔러서 우리의 약함을 보이지 말 것이다.”
대마도로의 출정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곧이어 이종무를 총대장으로 하는 대마도 출정군이 편성되었고, 각 도에 군함을 차출하여 6월 8일에 모두 견내량으로 모이기로 하였다.
이윽고 이종무가 이끄는 출정군이 대마도 정벌을 위해 출발하였다. 의기양양하게 출정하는 군사를 환송하던 상왕 태종과 세종은 한강정(漢江亭) 북쪽에서 이들을 전송하면서 격려차 안장·말·활·화살·옷·갓·신 등을 주었다. 당시 출정군의 규모는 배가 227척이었고, 군사 수만도 1만 7,285명이었으며, 이들은 65일간 먹을 식량을 싣고 떠났다. 그러나 출정군은 거제의 마산포에서 대마도로 향했다가 거센 파도와 바다 바람으로 가지 못하고 거제로 회항하였다.
얼마 후 다시 출정하게 된 대마도 정벌군 가운데, 10척이 먼저 대마도에 도착하였다. 이때 대마도에서는 우리의 정벌군을 대마도의 왜구들이 돌아오는 것으로 착각하고 술과 고기를 준비하고 맞이하였다. 그런데 잠시 후 조선의 많은 군사가 뒤를 이어 두지포(豆知浦)에 닿자 적이 넋을 잃은 채 도주하고 다만 오십여 명이 맞이하여 싸우다가 패해서 식량과 물건을 모두 버리고 달아나 험한 곳으로 들어갔다. 대마도에 도착한 조선의 정벌군에서는 당시의 대마도주 도도웅와(都都熊瓦)에게 글을 보내 항복을 권유하였다.
“이제 뜻밖에 너희들이 은덕을 잊고 의리를 저버려 스스로 앙화의 시초를 만들기로, 이제 변방 장수에게 명하여 섬을 에워싸서 항복하기를 기다렸는데, 오히려 미욱하게 고집을 피우고 깨닫지 못하는구나. 섬 가운데의 땅은 모두 산과 뫼와 바위들이어서 곡식을 심을 수 없으므로 틈을 타서 몰래 나와 남의 재산과 곡식을 도둑질하여 그 죄악이 극도에 달하였다. 또 너희들은 다만 고기를 잡아 팔아서 생계를 삼았는데 이제 와서는 너희들 스스로가 살길을 끊고 말았으니, 이런 생업을 잃고서는 앉은 채 죽기를 기다릴 뿐이리라. 만일 일조에 뉘우쳐 모두 와서 항복한다면 도도웅와에게는 좋은 벼슬을 주고 후한 녹을 내릴 것이며, 대관(代官) 등도 역시 넉넉히 돌보아 줄 것이며, 나머지 무리들도 아울러 우리 백성과 같이 대우할 터이니, 이것이 곧 너희들이 스스로 새롭게 되는 길이며 생계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다.”
정벌군이 대마도로 들어간 후 세종은 훈련판관 최기를 이종무에게 보내,
“예로부터 군사를 일으켜 적을 친다는 것은 그 뜻이 죄를 책하는 데 있는 만큼 많이 죽여야 함은 아니다.”
하면서 가급적 항복을 권유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한편에서는 가급적 항복을 권유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에서 정벌군은 대마도를 수색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일단 크고 작은 적의 배 129척을 빼앗았는데, 그 중에서 쓸만한 것 20여 척을 골라두고 나머지는 모두 불태워버렸다. 또 적의 집 1,939호를 태우며, 114명의 머리를 베고, 21명을 사로잡았으며, 중국 사람으로서 그들에게 포로된 자 남녀 131명을 얻었고, 밭에 있는 곡식을 베었다.
같은 해 7월 이종무 등은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면서 수군을 이끌고 거제로 돌아왔다. 8월에는 정벌군이 서울로 돌아오자 낙천정(樂天亭)에서 이들을 영접하여 위로하고 친히 장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이로써 그 동안 조선 조정을 괴롭혔던 왜구 소탕에 성공하였다.
골머리를 앓고 있던 왜구의 정벌 이후 세종은 또한 북쪽 변방을 괴롭히던 야인의 토벌에도 나섰다. 야인 토벌 후 세종은 그곳에 사군육진을 설치하였다. 사군의 설치는 이미 태종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태종 16년(1416) 지금의 중강진(中江鎭) 부근에 여연군(閭延郡)을 설치함으로써 4군의 설치가 완성되었다. 세종 때 이르러 여진족의 침입이 잦아지자, 세종 15년(1433) 이들을 점령한 후 강계부와 여연군의 중간 지역에 자성군을 설치하였고, 이후 무창군(茂昌郡), 우예군(虞芮郡) 등을 차례로 설치하였다. 아울러 동북쪽에는 육진을 두었는데, 종성(鍾城)·온성(穩城)·회령(會寧)·경원(慶源)·경흥(慶興)·부령(富寧)의 여섯 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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