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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사
장자방을 자처한 정도전
정도전은 자는 종지(宗之)이며, 호는 삼봉(三峯)이고, 본관은 봉화(奉化)이다. 정도전의 집안은 본래 봉화 지역의 향리였다. 아버지는 정운경으로 과거급제 후 관료를 지냈다. 어머니는 단양 지역의 사족인 우연의 딸이었다. 정도전은 어려서부터 유학뿐 아니라 의학, 군사 등 여러 분야의 학문을 섭렵하였고, 고려 공민왕 9년(1360) 19세의 나이로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이듬해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22살 때 충주사록에 임명되면서 관리 생활을 시작하였다.
정도전은 29살 때 성균관의 교관에 임명되었다. 당시 공민왕은 황폐해진 성균관을 중수하면서 이색을 오늘날의 학장격인 대사성으로 임명하였다. 이색을 통해서 유학을 육성함과 동시에 젊고 유능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정도전은 이런 국가적인 사업에 참여하게 된 것으로, 정도전과 함께 당대 대표적인 유학자인 정몽주, 이숭인, 박상충 등도 교관으로 임명되었다. 공민왕이 시해되고, 우왕이 즉위하면서 고려 조정은 급변하여 이인임·경복흥 등이 정권을 주도하였다.
때마침 원나라에서 사신을 보낸 적이 있었다. 평소 친명적인 입장을 보였던 정도전으로서, 원나라 사신을 맞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뜻을 같이 하던 이숭인·권근과 함께 도평의사사에 글을 올려 그를 맞이하면 안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이인임 등은 정도전에게 북원 사신의 영접을 명령하였다. 평소 눈에 가시처럼 걸리던 정도전이 끝내는 거절할 줄 알고 그를 제거하기 위해 내놓은 계책이었다. 이인임의 의도대로 정도전은 당시 실권자 중의 한 명인 경복흥의 집에 가서 말하기를,
“나는 사신의 머리를 베어가지고 오든가 그렇지 않으면 명나라에 묶어 보내겠다.”
하며 거부 의사를 표시하자 경복흥이 노하였다. 이 일로 정도전은 오늘날의 전라도 나주 근처인 회진현으로 유배를 갔다가 얼마 후 풀려나 삼각산(三角山) 밑에 초가를 짓고 유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평소 유생들에게 글을 가르치면서 불교를 이단이라고 하며 극렬하게 비난하였다. 한번은 고성(固城)의 백성 이금(伊金)이 스스로 미륵(彌勒)이라 하면서 백성들을 현혹시키던 적이 있었다. 이금은 심지어,
“내 말을 곧이듣지 않으면 3월에 가서 해와 달이 모두 빛을 잃을 것이다.”
하는 등 황당무계한 말을 하기도 하였다. 이금의 이런 행동에 대해 정도전은 말하기를
“이금과 석가는 그 말에 다른 것이 없다. 그런데 석가는 멀리 딴 세상의 일을 말하니 사람들이 그것이 헛소리인 줄 모르고 이금은 가까이 3월의 일을 말하니 허무맹랑함이 곧 드러날 따름이다.”
하며 불교를 철저하게 배격하였던 적이 있었다. 얼마 후에 그는 다시 관직에 등용되어 전의부령·성균제주(成均祭酒) 등의 관직을 지내다가, 이성계의 추천으로,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에 임명되었다. 사실 이성계와 정도전의 만남은 그 보다 앞선 우왕 10년(1384)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정도전이 여진족 호발도의 침입을 막기 위해 함경도에 있던 동북면도지휘사 이성계를 찾아가면서부터였다. 이성계의 군대를 본 정도전은 이성계에게 말하였다.
“참 훌륭합니다. 이런 군대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이성계에게는 대단히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그러나 정도전은 바로 자기의 본심을 드러내지 않고 거짓으로 꾸며 말하기를,
“동남쪽의 근심인 왜구를 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군영 앞에 노송 한 그루가 있으니 그 소나무 위에다 시를 한 수 남기겠습니다.”
하며 시를 적었다. 그때 정도전이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아득한 세월에 한 그루 소나무
푸른 산 몇만 겹 속에 자랐구나.
잘 있다가 다른 해에 만나볼 수 있을까?
인간을 굽어보며 묵은 자취를 남겼구나.
무엇인가 암시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를 《용비어천가》에서는 이미 천명의 소재를 알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평소 정도전은 취중에 말하였다.
“한나라 고조가 장자방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한고조를 이용했다.”
여기서 한고조는 이성계를 비한 것 같은데, 그렇다면 자신이 이성계를 이용했다는 말이 된다. 한 대장부의 거대한 야망을 느끼게 한다. 위화도회군으로 이성계가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하면서 정도전의 야망은 급물살을 탔다. 우왕과 창왕을 차례로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옹립하였다. 공양왕이 옹립될 당시 고려 조정에는 정몽주를 중심으로 한 온건세력이 있는 한편에 정도전·조준과 같이 급진 개혁세력이 있었다. 이성계가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이성계는 이미 급진세력의 맹주가 되어 있었다. 물론 정몽주를 중심으로 한 세력은,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에 의해 선지교에서 정몽주가 피살되면서 궤멸되기는 하였다. 그러나 그 와중에 정도전은 집안의 혈통 문제까지 들춰지면서 유배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정몽주가 피살된 후 이성계를 추대하려는 세력들의 움직임이 가속화되어 드디어 5백 년 고려왕조는 역사 속에서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조선왕조가 들어섰다. 조선이 개국된 후 정도전의 활약은 눈부셨다. 각종 문물제도를 정비하는 한편 개경에서 천도한 후 수도 건설 공사의 총책임자로 임무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또한 군사훈련에도 관심을 가지고 진도(陣圖)와 강무도(講武圖)를 만들어 왕에게 바치기도 하였다.
이렇게 개국 후 새롭게 문물을 정비하는 와중에 정도전은 태조의 두번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씨의 소생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는 문제에 관여하였다. 태조에게는 두 명의 부인이 있었다. 첫째는 신의왕후 한씨이고, 둘째가 신덕왕후 강씨였다. 한씨 소생의 아들로는 방의·방간·방원 등의 다섯 형제가 있었다. 이들은 강씨 소생의 아들보다도 아버지 태조가 왕위에 오르는 데 공도 많았다. 그런데 정도전이 이를 무시하고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게 하였던 것이었다.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살해함으로써 조선 건국이 가속화되는 계기를 만들었던 이방원과 첫째 부인 소생들의 불만이 커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하여 제1차 왕자의 난에서 정도전은 이방원이 이끄는 세력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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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장자방을 자처한 정도전 – 이야기 조선왕조사, 이근호,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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