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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사
노론의 연잉군 왕세제 책봉운동
숙종 승하 후 장희빈 소생의 세자가 왕위를 계승하니 그가 바로 경종이었다. 즉위한 경종은 외로웠다. 그의 주변에는 자기를 폐출시키려고 하였던 노론세력이 대거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숙종때 세자의 보호를 자처하였던 소론들은 경종의 즉위를 역전의 계기로 삼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경종 즉위년(1720) 7월 21일 소론계 유생 조중우는 상소하여,
“제왕(帝王)의 덕의(德義)는 효행(孝行)에 지나침이 없고, 추보(追報)의 도리는 예경(禮經)의 밝은 훈계이며, 어미가 아들로서 존귀(尊貴)하게 되는 것은 ‘춘추(春秋)’의 대의(大義)입니다.”
이렇게 전제하고는 희빈이 죽은 후에 매우 초라함을 말하며 희빈을 추숭하자고 하였다. 경종의 마음에 기대어 소론이 다시 재기를 노린 것이었다. 그러나 즉위 초 경종은 주위에 포진하고 있던 노론세를 제압할 수 있는 정치적 기반이 없었다. 조중우의 상소에 대해 노론은 경종을 계속 압박하여 결국 경종도 어쩔 수 없이 선왕의 처분에 어긋난다고 하며 조중우를 변방으로 유배보낼 수밖에 없었다. 노론 측은 이후에도 경종을 계속 압박하였으니, 성균관 장의 윤지술은,
“신사년(숙종 27)의 처분은 선왕께서 국가 만세(萬世)를 염려한 데에서 나온 것이며, 전후 장주(章奏)의 비답에 해와 별 같이 밝은 성의(聖意)를 보이셨으니, 전하께서 다시 마음에 다른 뜻을 품을 수 없는 것이며, 또 그것이 도리에도 당연한 일입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빨리 다른 대신에게 명하여 유궁(幽宮)의 지문(誌文)을 고쳐 지어 통쾌하게 사실을 밝히고, 선왕의 성덕(盛德)과 대업(大業)이 끝내 인멸(湮滅)됨이 없게 한다면 실로 국가의 다행이겠습니다.”
하며 장희빈에 대한 처분을 숙종의 지문에 명확하게 밝히자고 하였다. 경종도 비록 자신의 처지가 외로웠으나 이렇게까지 말하는 노론들을 묵과할 수만은 없었다. 이에 처음에는 윤지술을 먼 지방으로 유배보내도록 하였다. 그러자 조정의 노론들은 계속 상소를 올려 명령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였다.
“사기(士氣)를 꺽는 것은 옳지 않다.”
성균관 유생들은 오늘날의 동맹휴학이라고 할 수 있는 권당(捲堂)이라는 실력행사로 그것이 부당하다고 항변하였다. 경종은 결국 윤지술을 먼 지방에 유배보내라는 명령을 철회하였다. 이처럼 경종 즉위 초 노론은 국왕을 압박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주도를 계속 유지하려고 하였다. 이런 노론 측의 움직임에서 나온 것이 바로 연잉군의 왕세제 책봉이었다.
경종 즉위 초 노론들은 앞서 조중우의 사례에서 보듯이 실세한 소론과 남인들이 궁중 세력과 연결되어 자기들을 제거할지 모른다는 불안함을 느꼈다. 그런데 이때 경종은 나이 34세로 후사도 없었으며, 더구나 점차 병이 중해져 조정에서 치르는 각종 제전(祭奠)을 몸소 행하지도 못하고, 조정에 나아가서는 소장도 보지 못하여 그대로 쌓여 있다는 것을 구실로 세자 책봉을 서둘렀다. 경종 1년(1721) 8월 20일 노론의 이정소는 상소를 올렸다.
“지금 우리 전하께서는 춘추(春秋)가 한창이신데도 아직껏 저사(儲嗣)가 없으시니 다만 중외(中外)의 신민(臣民)만이 근심스럽게 걱정하고 탄식할 뿐만이 아닙니다.”
국본(國本)을 생각하고 종사의 먼 계책을 위해 세자를 책봉하자고 하였다. 이에 경종은 대신들에게 논의하도록 하였다. 이 자리에는 영의정 김창집과 좌의정 이건명을 비롯해 민진원·이홍술·이관명·이만성·이의현 등의 노론이 참석하였다. 그러다보니 결정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 자리에서 김창집 등은 계속 경종을 압박하여 이 일은 한시라도 늦출 수 없는 일이니 빨리 허락하라고 종용하였다. 마지못해 경종은 이를 윤허하였다. 이렇게 국왕의 허락이 내려지자, 문제는 이제 누구를 세자로 책봉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김창집과 이건명은,
“대신(臺臣)이 말한 바 조종의 영전(令典)이란 공정 대왕(恭靖大王) 때의 일을 가리킨 듯합니다. 성상께서는 위로 자전(慈殿)을 모시고 계시니, 자전께 들어가 사뢰어 수필(手筆)을 받은 연후에야 봉행(奉行)하실 것입니다. 신 등은 합문(閤門) 밖에 나가서 기다릴 것을 청합니다.”
하며 공정왕의 고사를 인용하며 왕대비의 수교를 받아와 결정하자고 하였다. 이때 왕대비는 인원왕후로, 그녀는 김주신의 딸이다. 김주신은 본래 소론이었으나 점차 노론과 가깝게 지내던 인물로, 그녀의 딸 역시 노론과 밀착되어 있었다. 김창집 등은 이점을 의식하고 이렇게 말한 것이었다.
김창집 등의 의견을 듣고는 그대로 하겠다고 하며 대궐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국왕이 나오지 않자 김창집 등은 초초하였다. 김창집 등은 내관을 불러놓고 임금에게 서둘러 나오도록 재촉하였다. 새벽 누종(漏鍾)이 친 뒤에야 경종이 낙선당(樂善堂)에서 신하들을 면대하겠다고 하였다. 경종이 낙선당에 나와 앉자 노론들이 들어갔다. 김창집은 마음이 급하여, 그 결과를 경종에게 물었다. 경종은 책상 위를 가리키면서 이르기를,
“봉서(封書)는 여기 있다.”
하였다. 김창집이 이를 받아서 뜯었다. 그러자 그 안에는 종이 두 장이 들어있었는데, 한 장에는 해서(楷書)로 ‘연잉군(延혿君)’이란 세 글자가 써 있었고 한 장은 언문으로 된 교서였다. 연잉군으로 세자를 결정하라는 것으로, 그 이유에 대해 교서에서 말하기를 ,
효종 대왕(孝宗大王)의 혈맥과 선대왕(先大王)의 골육(骨肉)으로는 다만 주상과 연잉군뿐이니, 어찌 딴 뜻이 있겠소? 나의 뜻은 이러하니 대신들에게 하교하심이 옳을 것이오.
이렇게 적혀 있었다. 노론들은 감격하였다. 이건명은 승정원 승지에게 전교를 작성하도록 하고는 그 전교에,
“연잉군을 저사(儲嗣)로 삼는다.”
하였다. 하룻밤 사이에 노론의 뜻대로 연잉군(즉 후일의 영조)이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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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노론의 연잉군 왕세제 책봉운동 – 이야기 조선왕조사, 이근호,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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