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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야기 조선
왕조사

안동 김씨 세도의 시작과 김달순 옥사

순조는 왕위에 오른 나이가 11살로서, 왕위에 오를 당시에는 왕비 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러나 정조가 생전에 안동 김씨 김조순의 딸을 자신의 며느리를 정해놓은 상태였다. 수렴청정을 시작한 후 어느 정도 정적들을 제거했다고 판단한 정순왕후는 1802년 순조의 혼례를 서둘기로 하였다. 정조가 일찍 점쳐놓은 김조순은 시파 계열의 인물이었다. 여기서 정순왕후는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정순왕후가 벽파 계열이니 양자가 서로 정치적 성향이 다른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렴청정을 시작하면서,

“선왕이 내세운 의리를 지켜야 한다.”

하였던 정순왕후로서도 난감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하여 선왕이 이미 정해놓은 혼처를 다른 곳으로 바꾼다는 것은 더욱 쉽지 않았다. 정순왕후는 울며 겨자먹기로 김조순과 사돈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혼사가 결정되기 전부터 그를 예우하여 이조판서를 제수하거나 대제학 등 제수하면서 대우하였다. 김조순도 이런 정순왕후의 입장을 잘 알기 때문에 관직이 올라가면서도 혼사가 결정되기까지 노심초사하면서 은인자중하였다. 그리고 혼사가 결정되는 날 정순왕후 앞에서,

“경신년에 초간택(初揀擇)한 뒤에 선대왕께서 특별히 소신에게 어찰(御札)을 내려 전궁(殿宮)에 대해 기뻐하는 내용을 낱낱이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더욱 더 자중해야 할 것으로써 신에게 면계하였습니다. 신이 오늘 경사스러운 날을 당하여 충정(衷情)을 억누르는 바이오며 모두 다 진달할 수가 없습니다.”

하며 그 동안의 억눌렀던 감정을 표시하였다. 이미 정조가 재간택까지 해 놓았기에 삼간택만이 남은 상태였다. 삼간택 후 왕실의 가장 어른인 정순왕후는 김조순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일 것을 선언하였다. 이로써 김조순은 왕의 장인으로서 서서히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서막을 열어가고 있었다.

그 시간은 그리 멀지 않았다. 순조 3년(1803) 12월 28일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둔 것이었다.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었다는 사실은 그 동안 그녀의 권위에 의지하여 정권을 장악했던 벽파에게는 청천벽력같은 것이었다.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자 국혼을 반대하였던 권유와 김노충 등을 제거한 것은 이런 권력관계의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후 안동 김씨 김조순을 중심으로 한 시파세력에 의한 벽파세력 제거가 박차를 가하면서 벽파들은 한동안 좌시하였으나 마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 결과 발생한 것이 순조 6년(1806)에 발생한 김달순 옥사였다.

김달순은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과 같은 안동 김씨 일원이었으나, 정치적 입장은 달라 벽파계열에 속한 인물이었다. 순조 5년(1805) 12월 그는 벽파의 대표적 인물인 김관주의 추천으로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김달순이 우의정에 오른 시기는 벽파로서는 위기의 시기였다. 이때 김관주는 사도세자 문제를 가지고 전화위복을 꾀하였다. 그리하여 박종경(순조의 생모 수빈 박씨의 조카)에게 가서 제안하였다.

“영조 때 박치원·윤재겸 두 사람이 사도세자의 잘못을 간하였으니 그대가 대궐에 들어가 임금을 뵙고 이 두 사람을 포상하여 돌아가신 사도세자가 간언을 용납한 덕이 있었다고 드러내었다. 그러면 바로 우의정 김달순이 들어가서 이 이야기를 다시 아뢰었고, 돌아가신 사도세자의 안이 확실하게 정해질 것 아니겠는가?”

박종경은 김관주에서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고 김달순에게 가서 이 안을 설명하고 서로 날짜를 정해서 일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김달순과 정한 날짜에 박종경은 입시하려고 채비를 차리는데 부친이 이를 이미 알고는,

“집안의 종자를 말릴 화가 장차 이를 것이다.”

하고는 박종경이 출입하지 못하도록 방에 가두어버렸다. 김달순은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약속한 날짜에 대궐로 들어가서 이미 박종경이 말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순조를 만나 정조 때 사도세자의 신원을 주청한 영남만인소의 소두 이우를 처벌할 것과 미리 약속했던 박치원 등에게 포상을 내리자고 건의하였다. 김달순의 건의에 대해 순조는 며칠을 두고보다가 해를 넘겨 1월 6일에,

“이우의 일은 돌아보건대, 애석하게 여길 것이 뭐가 있겠는가? 경신년 이전에는 박하원의 일이 제기되었을 때를 막론하고 또한 거론하지 않았었는데, 이제 어떻게 무단히 추후에 귀양보낼 수 있겠는가? 박하원 등은 이제 아뢴 바에 의거하여 살펴보면 이우와 다를 것이 없다고 하였는데, 이미 이우가 받지 않은 죄를 겪었다. 그런데 다시 귀양보내는 것은 참으로 의의가 없는 것이지만 처음의 연석에서 청한 것이기 때문에 우선 아뢴 대로 시행하게 한다. 박치원(朴致遠)·윤재겸(尹在謙) 두 사람의 일에 이르러서는 차마 들을 수 없고 차마 말할 수 없는 것이 선대왕조(先大王朝)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선조(先朝)의 지극히 정미(精微)한 의리를 내가 어기지 않고 준수한다면 의리는 저절로 밝혀질 것이다. 두 사람의 일에 대해서는 내가 감히 옳다 그르다 하지 못하겠다.”

하며 이우에 대한 처벌은 시행하되, 박치원 등에 대한 포상은 당장 시행할 수 없다는 유보적인 입장을 밝혔다. 그러자 조급해진 김달순은 다시 상소하여 종용하였으나 1월 15일 조득영이,

“전하께서도 또한 선왕께서 지키던 것을 지키고 선왕의 의리를 의리로 삼아서 선왕께서 엄중히 분변하여 굳게 지킨 것은 또한 엄중히 분변하여 굳게 지키고, 선왕께서 차마 말하지 못하고 차마 듣지 못했던 것을 또한 차마 말하지 못하고 차마 듣지 못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며 선왕 정조 때 정해진 의리를 따라야 한다고 강변하여 신하로서 감히 언급하지 말아야 할 내용을 언급했다는 등의 죄목을 들어 김달순을 탄핵하였다. 조득영의 상소를 계기로 김달순은 중도부처(조선시대 벼슬아치에 대한 유형(流刑)으로 관원을 유배시킬 때 중간지점을 지정하여 거기에 머물게 한다. 이는 3등 이하의 죄에 해당하는 것인데, 유배지는 황무지·바닷가 섬 등 지방관이 지정하였다) 되었다가 사사되었으며, 벽파의 핵심인물인 김구주, 김관주 등도 모두 유배형을 받았으며, 김관주 같은 이는 유배 도중 사망하였다.

이로써 벽파세력은 급격히 약화되면서 더 이상 조정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대신 김조순의 권력이 점차 강해지기 시작하였다. 물론 순조가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려던 노력들이 간간이 이루어졌으나 김조순과 그를 중심으로 형성된 안동 김씨 일원과 주변세력들의 세도정치로 인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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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집필자 소개

국민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사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후기 정치사를 전공했으며, 현재 국민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출처

이야기 조선왕조사
이야기 조선왕조사 | 저자이근호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조선왕조 500년의 인물과 사건을 대화 형식으로 서술한 <이야기 조선왕조사>. 조선의 역사를 '이야기식'으로 정리하면서 500년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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