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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사
한명회와 압구정
성종은 즉위 후 직접 정사를 주관할 수 없었다. 때문에 할머니 정희왕후의 수렴청정과 재상급 관리들이 원상으로서 정치를 주관하였다. 원상은 재상들이 승정원에서 국사를 논의하고 처결하던 제도로, 승정원은 오늘날 대통령 비서실에 준한다. 재상으로서 국왕의 비서실까지 장악한 것이었다. 실로 어마어마한 권력이 주어졌음을 상상할 수 있다.
더구나 당시 원상을 겸하던 인물은 한명회·신숙주·구치관 등으로, 이들의 면면을 보면 대개 세조의 계유정란에 참여한 이후 세조대부터 줄곧 정승자리를 차지하던 인물이었다. 뿐만 아니라 계유정란 이후 몇 차례 이루어진 공신책봉 과정에서 서너 차례씩 공신에 책봉되었던 인물들이었다. 이러한 공신 책봉은 비단 자신에 그치지 않고 그의 일가와 심지어 외가, 처가 등에게까지 미치면서 막강한 권력과 부를 소유하게 되었다. 심지어 한명회는 자신의 권력을 영속적으로 보장받기 위한 일환에서 자신의 두 딸을 예종과 성종비로 납비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이들과 연결된 일가와 일군의 세력을 오늘날 우리는 ‘훈구세력’이라고 한다.
이들 훈구세력들은 정치적으로 권력을 가지고 인사청탁에 개입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부정축재를 하기도 하였다. 이미 국가적 토지관리체계인 과전법이 붕괴되면서 서서히 대지주들이 성장하는 당시 사회경제적 분위기에 편승해서 이들은 지방에 막대한 규모의 농장을 개설하기도 하였다. 당시 훈구세력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한명회가 성종 18년(1487)에 사망한 후 그에 대한 사관들의 평가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권세(權勢)가 매우 성하여, 추부(趨附)하는 자가 많았고, 빈객(賓客)이 문(門)에 가득 하였으나, 응접(應接)하기를 게을리하지 아니하여, 일시(一時)의 재상들이 그 문(門)에서 많이 나왔으며, 조관(朝官)으로서 채찍을 잡는 자까지 있기에 이르렀다. 성격이 번잡한 것을 좋아하고 과대하기를 기뻐하며, 재물을 탐하고 색(色)을 즐겨서, 전민(田民)과 보화(寶貨) 등의 뇌물이 잇달았고, 집을 널리 점유하고 희첩(姬妾)을 많이 두어, 호부(豪富)함이 일시(一時)에 떨쳤다.
과연 그의 부와 권력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이런 그가 성종 7년(1476)경에는 유유자적하기 위해 한강가에 압구정이란 정자를 지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오히려 화근이 되어 그의 화려했던 정치 인생에 종지부를 찍게 될 줄은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다. 한명회 소유의 정자였던 압구정이라는 명칭은 한명회가 중국 문객 예겸에게 부탁해서 받은 것이었다. 한명회가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예겸과 마주앉아 시로 서로 응대하던 차에 한명회가 예겸에서 말하였다.
“한강(漢江)가에 조그마한 정자 하나를 지었으니, 원컨대 아름다운 이름을 내려 주십시오.”
이에 예겸은 압구(狎鷗)라고 이름하고 또 기(記)를 지어 주었다. 한명회가 압구정이란 정자를 지은 것은 벼슬을 사양하고 강호(江湖)에서 늙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압구정이 완성되는 날 성종은 이를 기려 압구정 시를 직접 지어 내리기도 하였다. 워낙 풍광이 좋은 터라 그 소식이 중국에까지 알려져 사신이 오면 반드시 거치는 코스가 되었다. 성종 12년(1481)에도 역시 중국 사신이 와서 압구정을 관람하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한명회는,
“중국 사신이 신의 압구정을 구경하려 하는데, 이 정자는 매우 좁으니, 말리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고 성종에게 청하였다. 그러자 성종은 한명회의 말대로 중국 사신에게 좁아서 볼 수 없다고 하니 조선에 파견되었던 사신은 굳이 떼를 쓰며 말했다.
“좁더라도 가 보겠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중국 사신의 압구정 방문이 허가되었다. 문제는 이때부터 비롯되었다. 한명회가 자신의 정자가 좁아서 중국 사신이 방문하여도 잔치를 열 수 없다는 구실로, 국왕이 사용하는 차일을 청하였던 것이다.
“신의 정자는 본래 좁으므로 지금 더운 때를 당하여 잔치를 차리기 어려우니, 해사(該司)를 시켜 정자 곁의 평평한 곳에 휘장을 치게 하소서.”
그러나 성종은 이를 허가하지 않고 매우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경(卿)이 이미 중국 사신에게 정자가 좁다고 말하였는데, 이제 다시 무엇을 혐의하는가? 좁다고 여긴다면 제천정(濟川亭)에 잔치를 차려야 할 것이다.”
하였으나 한명회는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처마에 이어대는 장막을 청하였다. 그러자 성종은 다시 제천정에서 잔치를 치르도록 하고 이를 불허하였다. 그러자 한명회도 여기서 굴하지 않고 심지어 자기 아내가 아파서 잔치에 나갈 수 없다는 핑계로 자신의 의사를 관철하려고 하였다. 이에 진노한 성종은 승정원에 다음과 같이 지시하였다.
“우리나라 제천정의 풍경은 중국 사람이 예전부터 알고, 희우정(喜雨亭)은 세종께서 큰 가뭄 때 이 정자에 우연히 거둥하였다가 마침 영우(靈雨)를 만났으므로 이름을 내리고 기문(記文)을 지었으니, 이 두 정자는 헐어버릴 수 없으나, 그 나머지 새로 꾸민 정자는 일체 헐어 없애어 뒷날의 폐단을 막으라.”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후 승지나 대간들의 비난이 한명회에게로 쏟아졌다. 이때마다 성종은 한명회의 잘못을 꾸짖는 선에서 일을 매듭지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반발이 계속되자 결국 성종도 한명회의 국문을 지시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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