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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사 외척의 다툼이 화를 부르다
을사사화
乙巳士禍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진행되면서 그녀 주위에 있던 소윤세력들이 득세하였다. 원래 장경왕후의 오라비인 윤임과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은 다 같은 파평 윤씨이면서도 하나는 인종의 외숙이고 또 하나는 명종의 외숙이라는 점에서 제각기 세력을 펴려 하여 모략과 암투를 계속하였다. 그들은 당시 대윤(大尹 : 윤임 일파)과 소윤(小尹 : 윤원형 일파)이란 지목을 받고 있었다.
인종의 뒤를 이어 나이 어린 명종이 등극하자, 문정왕후가 정치에 참견하게 된 것을 그의 동생 윤원형은 내심 자기의 시대가 왔다고 기뻐하였다. 그는 그의 무리인 정순붕(鄭順朋)·이기(李芑)·임백령(林百齡) 등과 모의하여, 형조판서 윤임·좌의정 유관(柳灌)·이조판서 유인숙(柳仁淑) 등 강직 공명한 선비들을 반역음모죄로 몰아 죽이고, 그 나머지 대윤을 싸고도는 40여 명의 선비들을 주살하거나 혹은 귀양보냈다.
그들 윤원형 일당은 인종 때는 소인으로 지탄받아 꼼짝 못하고, 때를 노리고 있다가 인종이 승하하자 이내 활동을 개시하여 모함질을 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난정(蘭貞)이라는 여인을 궐 내로 들여보내어,
“인종 때 윤임 일파가 자기 권력을 보존할 생각으로 경원대군(명종)을 몰아내고 계림대군(桂林大君)을 그 후계자로 세우려 하였습니다.”
하는 말로 대비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이에 대비는 크게 의심을 하여 자기 동생 윤원형을 불러 일을 조사해달라고 부탁하였으니, 누가 꾸민 연극이라고 이로운 보고를 할 리가 있었으랴. 윤원형 등은 때는 왔다 하고 윤임과 유관·유인숙 등을 공모자로 몰아 반역 음모를 했다는 보고를 대비에게 올리는 한편, 대간들을 충동하여 탄핵의 상소를 하게 하였다.
대비는 마침내 대노하여 명종을 데리고 충순당으로 가서 여러 신하들을 모아놓고 사건의 처리를 하문하였다. 신하들은 그것이 소윤 일당의 농간인 줄 모르는 자가 없었으나, 기사년에 혼들이 났던 여러 신하들이 묵묵히 앉아 있는 가운데 권발과 이언적이 나와서 아뢰기를,
“전혀 사실이 아니오이다.”
하고 간쟁했으나 대비는 듣지 않고 윤임·유관·유인숙 등을 멀리 귀양보내었다가 사약으로 죽게 하고, 그 나머지 사람들도 혹은 죽이고 귀양보냈다. 그러나 사화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 이듬해인 병오년에는 경기 광주 양재역에 붙은 벽서가 사관 안명세(安命世)의 짓이라 하여 그를 죽였으며, 아울러 깨끗한 선비 여럿을 공모자로 몰아 죽였다. 다음 기유년에는 또 이중윤(李仲胤)의 모함으로 유생 수백 명이 죽었다. 그리하여 다시 유림의 기운이 땅에 떨어지고, 백성들은 수심에 잠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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