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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야기 조선
왕조사

소현세자의 죽음과 강빈 옥사

인조의 항복으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등 상당수가 인질로 청나라에 끌려갔다. 이들은 주로 심양에서 거처하였다. 심양에서 왕자들의 생활은 사뭇 달랐다. 봉림대군이 절치부심하면서 생활하던 것과는 달리 소현세자는 그곳 관리들과 교류하면서 조선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였다. 하루는 조선과의 외교를 관장하던 예부승정 용골대라는 인물이 와서 소현세자에게 말하기를,

“양국이 이미 일가가 되었으니 모든 일은 반드시 그 사실을 고해야 합니다.”

하고 세자를 회유하기도 하였다. 청국에서는 처음 이들이 심양에 도착했을 때는 심하게 감시하더니 시간이 경과하면서 자유스럽게 활동하도록 배려하였다. 한편 소현세자는 새로운 서양 문물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청나라에 가기 전에도 정두원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 돌아오면서 자명종 등을 가지고 돌아오자 깊은 관심을 보인 적이 있었다. 그런 그에게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인조 22년(1644) 청나라가 북경으로 천도하게 되어 세자 일행도 북경에 들어가서 약 두 달여 간을 머물게 되었다. 북경에서 머무는 동안 소현세자는 탕약망(湯若望 : Adam Schall)과 교제하였다. 소현세자를 탕약망의 소개로 유럽인의 천문대를 방문하였고, 서양인 과학자들의 방문을 받았으며, 서양 역법을 소개하려고까지 하였다. 소현세자는 심양으로 돌아올 때 탕약망에게서 천문역산서와 지구의, 천주상 등을 받았다.

심양에서 소현세자의 활동은 병자호란을 겪은 후 자존심이 상했던 인조와 사대부들의 정서와는 거리가 있었다. 거기다 풍문으로 들리는 소리가 청나라에서 세자를 조선으로 들여보내 국왕으로 삼고 인조를 심양으로 들어오도록 한다는 소리가 전해졌다. 심지어 소현세자 귀국 전에 발생한 심기원 역모사건에서도 세자를 추대하는 소리가 나왔다. 그런 만큼 인조의 심기는 매우 불편하였다. 인조의 불편한 심경은 1644년 12월 김육이 원손이 10살이 되었으니 입학례를 거행하자고 건의한 적이 있었는데, 왕은 묵묵부답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고 하니 그 의중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약간은 의혹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던 와중인 1645년 3월 소현세자가 귀국하였다. 대부분의 신료들이 이를 국가의 경사로 여기고 기쁨을 감추지 않았는데, 인조는 의혹의 눈길을 보냈다.

“청국의 이번 조치는 과연 호의에서 나왔지만 별도의 정황이 없겠는가?”

소현세자는 귀국하면서 북경으로부터 많은 물건들을 가지고 들어와 빈축을 받기도 하였으나 얼마 후 일부를 호조에 돌려주기도 하였다. 약 8년간의 인질생활로 고국에 돌아온 소현세자는 여러 가지 기대를 하고 왔을 것이다. 앞서 북경에서 탕약망이 천문역산서 등을 주자 이에 대해 감사의 표시로 서한을 보낸 적이 있는데, 이 서한에서 소현세자는 새로운 문물의 수용과 전파를 통해 조선을 새로운 세상으로 만들려는 의지를 드러냈었다.

“제가 저의 왕국으로 돌아가는 즉시 그것을 궁중에서 사용할 뿐만 아니라 출판하여 학자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합니다. 그것들은 장차 사막에서 박학의 전당으로 바꿔 놓은 은총의 보물로 찬양될 뿐 아니라 조선인이 서구과학을 완전히 습득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그의 의지는 성사되지 못하고, 귀국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병을 얻었다. 이어 며칠 동안 침을 맞다가 갑자기 죽고 말았다. 이러한 소현세자의 죽음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점이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평소 소현세자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인조의 후궁 소용 조씨가 있었는데, 소현세자에게 시침하던 이형익이라는 자가 본래 소용 조씨 집안에 출입하던 자였다는 점이다. 이밖에도 여러 의혹이 있으나 현재로서는 더 이상의 규명은 불가능하다. 소현세자 사후 약 두 달여가 경과한 윤6월 인조는 그의 두번째 아들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종법의 원칙대로 한다면 소현세자의 아들에게 세자의 자리가 돌아가야 했지만 인조는 이런 종법질서를 무시하고,

“비록 시절이 태평할 때일지라도 반드시 장성한 군주를 얻어야 나라가 편안한데 하물며 오늘날에 있어서냐?”

하며 당시 왕실 내 왕위계승권자 가운데 장성한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한편 소현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부인인 강빈에 대한 비방의 말이 빗발치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강빈은 상감마마에 대하여 다른 뜻을 품고 소현세자가 임금이며 당신이 중전이라 하여 미리 중전의 복장을 만들게 하고 거처하는 곳을 내전이라 부르게 하였습니다. 그 아드님인 왕손을 오랑캐와 혼인시키려 하였으며 흉악한 것을 만들어서 상감이라 하여 온갖 흉측한 예방을 하여 땅에 장사지냈고, 조정으로 돌아와서는 상감마마의 수라상에 독약을 넣으려다가 발각되었나이다.”

이러한 말을 인조에게 아뢰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증거가 있느냐고 하문하니, 김자점과 조귀인(趙貴人)이 나서서 그 사실을 확인케 하려고 애썼던 것이다. 이에 인조는 강빈을 괘씸히 여기어 강빈의 오라비인 강문성·강문명·강문두·강문벽을 외딴 섬으로 귀양을 보냈다가 후에 잡아다 곤장을 쳐서 죽였다.

한편 금부의 나졸과 영문의 병정들까지 움직여서 세자빈이 쓰고 있던 빈궁을 둘러싸고 달려들어 강빈을 잡아다가 친정으로 몰아냈다. 이에 친정이 망하고 세자빈 자리에서 쫓겨난 강빈은 죄인으로서 눈물의 세월을 보내다가 다음해인 인조 24년(1646) 3월 15일에 임금이 내린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이것을 세상 사람들은 김자점과 조귀인이 꾸민 모함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비참한 죽음을 당한 연후에 여러 신하들이 강빈과 그 친정의 죄를 용서하기를 청하다가 숙종 때에 이르러서야 김창집(金昌集) 등이 또 상소를 올려서 겨우 무참히 죽은 강빈의 세자빈 자리를 되돌려주는 동시에 세자빈의 아버지 강석기의 관직을 회복시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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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집필자 소개

국민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사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후기 정치사를 전공했으며, 현재 국민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출처

이야기 조선왕조사
이야기 조선왕조사 | 저자이근호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조선왕조 500년의 인물과 사건을 대화 형식으로 서술한 <이야기 조선왕조사>. 조선의 역사를 '이야기식'으로 정리하면서 500년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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