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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야기 조선
왕조사

영명한 군주의 최초 시험 무대

성종 승하 후 원자 융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가 연산군인데, 그의 모친은 앞서 폐위된 윤씨였다. 연산군이 새로 왕위에 올랐을 때 조정과 민간에서 모두 ‘영명(英明)한 임금’이라 일컬었다. 부인은 신승선의 딸로서, 그녀와 가례가 치러지는 날 비바람이 세차게 불었다고 한다. 그러자 성종은 사돈인 신숭선에게 편지를 보내,

“세상의 풍속은 혼인날에 바람 불고 비 오는 것을 싫어하는 모양이나 대개 바람이 만물을 움직이게 하고 비가 만물을 윤택하게 하니 만물이 사는 것은 모두 바람과 비의 공덕이라.”

하였는데 마치 가례식날의 바람과 비가 후일 그녀의 인생을 미리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영명한 군주라는 평판을 듣고 왕위에 즉위하기 전에 가장 큰 일이 바로 선왕의 장례를 주관하는 것이었다. 선왕 시신의 습을 마치고 전(奠 : 장례전 영좌 앞에 술과 음식 등을 차리는 일)을 하려는데 연산군은 밖으로 나와버렸다. 그는 부왕의 장례를 주관하면서 처음으로 정치적 실험무대를 맞이한 것으로 다름아닌 불교식 장례 절차를 놓고 신료들과 논쟁을 벌인 것이다. 성종의 장례를 불교식 절차로 거행하는 문제를 처음 거론하는 이는 당대 대문호로 알려진 성현이었다. 성현은 당시 예를 주관하는 위치에 있던 예조판서였다. 성현은 성종 승하 직후,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인 세자에게 말하기를,

“선대 조정의 구례(舊例)로는 국상(國恤) 칠칠일(七七日) 및 소대상(小大祥)에는 모두 절에서 재(齋)를 지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문(禮文)에 실리지 않았으며, 대행 대왕(大行大王 : 임금이나 왕비가 죽은 뒤, 시호를 정하기 전에 이르던 칭호)께서도 불교를 믿지 않으셨는데, 이번에는 어찌 하오리까?”

하자 이 말을 들은 세자는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내시 김효강을 왕비에게 보내 문의하였다. 그러자 왕비는

“대행 대왕께서 불교를 좋아하지는 않으셨으나, 재를 지내지 말라는 유교(遺敎)가 없었으며, 또 조종조(祖宗朝)에서 다 행하셨으니, 이제 폐지할 수 없다.”

하여 불교식 장례절차를 지시하였다. 이 일에 대해 《연산군일기》에서 사관은 세자가 이를 부당하게 생각하여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고 이를 왕비에게 문의한 것이며, 왕비의 의견에 따라 시행한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과연 연산군의 의지가 전혀 반영되지 않았을까? 결론은 어찌보면 연산군도 그럴 의도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는 이후에 전개되는 내용을 보면 확실하다. 예조판서 성현이 문제를 제기한 다음 날 사헌부 장령 강백진, 사간원 정언 이의손 등은 불교식 장례절차인 수륙재의 시행에 반대하면서 말하기를,

“대행 대왕을 위하여 수륙재(水陸齋)를 내리라는 전교를 들었습니다. 대행 대왕께서 일찍이 불법을 좋아하지 않으셨고, 또 지금 신정(新政)의 처음이어서 신민이 좋은 정치를 바라는 시기이니, 사도(邪道)를 버리고 예문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하자 연산군은 말하였다.

“선왕께서 어찌 다 불법을 좋아하셨으랴마는, 수륙재의 거행은 조종조로부터 이미 그러하였고, 대행 대왕께서도 그만두라는 유명(遺命)이 없었으니, 이제 문득 폐지할 수 없다.”

선대왕들의 관행을 따라 불교식 수륙재를 거행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러자 강백진 등은 효자는 어버이의 뜻을 받든다는 뜻으로 시행을 물릴 것을 청하였으나, 연산군은 말하였다.

“선왕께서 모두 행하셨고, 대행 대왕께서 비록 불교를 좋아하지 않으셨으나, 또한 선왕을 위하여 행하셨으니, 나도 마땅히 대행왕을 위하여 행하겠다.”

이를 보면 연산군이 전혀 의지가 없었다고 할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일이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후에도 홍문관부제학 성세명, 예문관 봉교 이소 등은 불사의 중단을 요구하였으며, 홍문관 관리 손주는 수륙재에 사용할 글을 지으라는 국왕의 명령을 거부하였다. 이 일은 일파만파로 확대되어, 해를 바꾸면서 심지어 공부하던 젊은 성균관 유생들이 공부를 버리고 집단으로 상소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물론 반드시 이를 반대한 경우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정승의 지위에 있던 노사신은,

“일에는 늦출 것과 서두를 것이 있는데, 지금 재를 지내는 한 가지 일이 나라의 흥망(興亡)이 조석에 달린 중대한 일이라면 말하는 것이 옳겠으나, 선왕을 위하여 재를 지내는 것은 조종조의 고사(故事)이니, 이것을 가지고 불교를 숭상하는 것이라 할 수 없는데 곡위(哭位)에서 애달프시므로 일을 말할 때가 아닌데도 할 일을 버리고 대궐에 모여서 논란하여 마지 않으니, 신은 매우 그르다고 여기며, 큰 일 외에 이런 일은 반드시 답할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며 연산군을 편들고 나섰다. 선왕의 장례를 불교식으로 치를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시작된 논쟁은 이후 계속 불처럼 확대되어 나갔다. 그런데 이 문제는 단지 장례를 불교식으로 치를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연산군 즉위 초 정치세력의 향배와 관련된 것이며, 연산군대의 왕권의 향방을 결정하는 대단히 의미있는 일이다.

사실 연산군이 추진하려는 불사를 반대하는 세력들은 대개가 자신의 부왕인 성종대에 등용되었던 사림세력들이 대부분이며, 그들과 정치적 지향이 유사한 세력들이었다. 사림세력들은 성리학을 이론적 무기로 하여 조선 사회를 유교적 이상사회로 재편하려던 세력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연산군의 이 같은 주장은 그들이 구상하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유교적 이상사회는 공자가 지향하던 사회이며, 이는 정치적으로 중국 하·은·주 삼대의 왕도정치를 이상적인 모습으로 하는 사회였다. 왕도정치는 패도정치와는 다소 정치적 개념이 다른 용어로서, 이후 사림세력들이 주장하는 임금과 신하가 함께 다스리는 정치, 이른바 군신공치(君臣共治)를 정치적 이상으로 하였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연산군의 독단적인 행동은 그들에게 용납될 수는 없었다. 반면 노사신 등은 이들과는 다른 정치적 성향을 보이던 세력들로 이른바 훈구세력 계열이었다. 결국 이 논쟁은 유교적 이상사회를 지향하는 젊은 사림세력과 훈구세력과의 대결과정을 보이고 있는 사건이었다. 이 과정에서 성종의 경우는 강력한 왕권으로 어느 한쪽도 기울지 않으면서 양쪽 세력의 균형과 견제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새롭게 왕위에 오른 연산군이 처음부터 이렇게 하기는 곤란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히려 왕권으로 이를 제압하고 자신이 그들의 우위에 서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 결과 상당수 성균관 유생들에게 과거시험에 응시를 제한하는 정거(停擧) 조치를 내림으로써 이를 표현하려고 하였다. 형식적으로는 연산군의 한판승으로 끝난 사건이었지만 이후 양자의 정치적 대립은 더욱 골이 깊어갔다. 그리고 그것이 보다 규모가 확대되어 나타난 사건이 무오사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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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집필자 소개

국민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사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후기 정치사를 전공했으며, 현재 국민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출처

이야기 조선왕조사
이야기 조선왕조사 | 저자이근호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조선왕조 500년의 인물과 사건을 대화 형식으로 서술한 <이야기 조선왕조사>. 조선의 역사를 '이야기식'으로 정리하면서 500년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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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영명한 군주의 최초 시험 무대이야기 조선왕조사, 이근호,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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