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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사
효종의 북벌의 꿈
인조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한 효종은 왕자 시절 청나라 인질로 가서 생활한 경험이 있었다. 그는 심양에 있으면서 형 소현세자와는 달리 청나라에 대한 복수를 마음 속에 다지면서 생활하였다. 인조와 불화로 형 소현세자가 불귀의 객이 된 후 세자로 책봉되면서 효종은 마음 속에 다시 한번 그 마음 되새겼을 것이다. 효종은 즉위 후 이를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하나씩 실현하였다. 효종이 즉위했을 때 조정에는 김자점을 중심으로 한 친청 세력이 있었다. 이들을 놔두고 효종의 북벌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먼저 이들을 견제할 세력으로 산당세력을 주목하고 이들을 불러들였다.
인조 말년 경 서인들 내부에서 몇 개의 계파가 나뉘어졌다. 원당(原黨)·낙당(洛黨)·산당(山黨)·한당(漢黨) 등이 그것이다. 이들 가운데 원당과 낙당은 인조반정 공신들로서, 원당이란 원평부원군 원두표를 중심으로 하는 세력, 낙당은 상락부원군 김자점을 중심으로 세력이었다. 산당은 김집을 영수로 하며 송준길·송시열 등 회덕과 연산의 산 속의 사람들이어서 이런 명칭이 주어졌다. 한당은 김육을 영수하는 세력으로 모두 한강 주위에 살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었다. 이들 가운데 김자점을 중심으로 한 낙당은 친청적 성향이 있는 세력들이었다. 반면 산당세력 대부분은 처사적인 삶을 지향하며 향촌에 은거하던 세력들로 성리학 이념에 철저한 세력들이었다. 그런 만큼 북벌을 추진하던 효종에게 성리학적 정통론을 강조하던 산당세력들은 큰 힘이 될 수 있는 세력들이었다.
효종이 산당세력을 불러들일 때 현달한 위치에 있던 신면(申冕)이 효종의 명령을 전하고는 송시열과 대화하면서 은근히 그들의 의중을 떠보기 위해 물었다.
“산 사람들이 과연 오겠는가?”
그러자 송시열이 답변한다.
“그렇소이다.”
그러자 신면은
“나와서 장차 무슨 일을 할 것인가?”
하고 되물으니, 송시열이 대답하였다.
“복수하고 부끄러움을 씻는 일과 또 강빈(姜嬪)의 원통함을 풀어주는 것이 제일 먼저 할 일이요.”
그러자 신면은 송시열에게 말을 전하라고 하면서,
“그대들은 마치 봉황과 같아서 그 소리만 듣고 사람들이 저마다 사모하니 간혹 세상에 나와서 깃을 펴는 것은 나쁠 것이 없소. 하지만 여기 내려와서 닭이나 따오기 같은 잡새들과 더불어 다투고 보면 이것은 부녀자의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을 것이라 하시오.”
하였다고 한다. 송시열은 신면의 이 말을 산당들에게 전하였는데, 이 말을 들은 대부분이 매우 노여워하면서 신면에게 반감을 품게 되었다. 한편 산당세력들을 끌어들여 친청세력을 견제하고 제거하려던 효종의 계획은 오래지 않아 실현되었다. 산당세력들은 조정에 들어오자 저마다 춘추대의의 명분을 강조하며 치욕을 씻을 방안을 제시하였다. 물론 그 방법에서 효종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지만 말이다. 조정의 분위기가 이처럼 금방이라도 북벌을 할 것 같은 분위기가 되자, 청나라를 끼고 권력을 유지하던 김자점은 점차 효종에게 배척되면서 그 입지가 매우 불안해졌다. 결국 김자점은 역모 혐의로 효종이 즉위한 다음해 유배가게 되었다. 이 와중에서 김자점 등은 청나라에 이런 분위기를 전하고 위기를 타개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역관 이형장을 시켜서 청나라에 보고하기를,
“새 임금이 오래된 신하를 물리치고 산림 속 사람들을 쓰되, 벼슬의 순서도 따지지 않고 올려 쓰니 장차 무슨 일을 시작하려는 속셈일 것입니다.”
하고 참소하였다. 그러자 청나라 조정에서는 사신을 보내 이 문제를 조사하고 조선에서도 효종 1년(1650) 3월에 사은사를 보내 이를 변명하였다. 당시 사은사로는 종친인 인성군 영과 이시방 등이 파견되었다. 이들이 중국에 도착하자 청나라에서
“지난 번 칙사의 행차에 그대 조정의 거조를 살피도록 했는데, 안으로 삼공과 육경, 밖으로 감사와 병사를 모두 새 사람으로 바꾸고, 선조(先朝)의 구신(舊臣)을 모두 쫓아내어 국왕이 위에서 고립되게 하였다고 하였다. 다른 의논이 있어서인가?”
하고 힐문하였다. 그러자 사은부사 이시방은 말하였다.
“국왕이 왕위를 이은 뒤 구신으로서 죄를 받은 이는 별로 없다. 나도 선조 때 형조 판서였는데, 지금 본직으로 왔다.”
그러자 그들은 관리들 가운데 전직으로 그대로 있는 자들을 일일이 대라는 등 추궁하였다. 그러자 이시방 등은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김자점에 대해 말하였다.
“김자점은 내국도제조(內局都提調)로서 선왕(先王)께서 위독하던 때 시약(侍藥)을 제대로 살피지 않았기 때문에 본직을 파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추궁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협박하기도 하였다.
“자점은 큰 공이 있는 사람으로 전왕(前王)이 믿고 중히 여긴 자이다. 그리고 상국에도 정성을 바쳤는데, 이제 갑자기 쫓아냈다. 새로운 사람들과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는가? 사신이 끝내 주장한 자를 바른 대로 말하지 않으니, 부사와 서장관도 필시 그 사이에 간여한 것이다. 우리들이 가서 조사해야겠다.”
장시간에 걸친 청국에서의 추궁은 결국 사은사로 갔던 조선 측 사신을 황제의 명을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구류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이 문제는 이후에도 계속 거론되었는데, 사태가 더 이상 확산되는 것을 우려해 당시 영의정 이경석과 예조판서 조경이 자진해서 의주의 백마성에서 유배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효종은 산당세력들을 끌어들여 친청세력들을 제거하려던 효종의 의지가 관철된 후 정력적으로 북벌을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리하여 어영군을 증강하고, 국왕의 친위군인 금군의 숫자도 늘리는 등 실질적인 군비 증강에 주력하였다. 또 군비 증강에 필요한 재원의 마련을 위해 그 동안 장부에서 누락된 노비들을 추쇄해서 이들에게 세금을 징수하였으며, 대동법과 같은 재정정책 변화를 모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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