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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사 경종독살설이 화를 부르다
무신란
신임옥사로 소론 주도의 정치가 이루어지던 와중에 경종이 재위 4년 2개월 만에 승하하고 그 뒤를 왕세제 연잉군이 계승하니 그가 영조였다. 노론은 기대가 컸을 것이다. 그러나 영조가 즉위하던 당시 조정은 영의정 이광좌를 중심으로 소론 일색이었다. 영조는 출생 이후 의도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노론들의 보호 아래 성장하였으며, 그들의 노력에 의해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오히려 지금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세력들은 자기에게 위협이 되는 소론세력이었다. 영조로서는 자신의 왕위 보존을 위해서라도 노론세력들을 불러들여야 하였다. 그리하여 즉위한 지 얼마 안 되어서 귀양생활을 하던 노론의 민진원을 선대 왕후의 동기라 하여 특별히 석방하였다. 노론 진출의 신호탄이었다.
민진원을 석방한 후 기회만을 보고 있던 영조에게 때가 찾아왔다. 바로 즉위한 해 11월 노론계 유학(幼學) 이의연이 상소를 올려,
“오직 저 뭇 소인배(소론을 지칭함)들만이 틈을 엿보고 흉악한 뜻을 드러내어 먼저, ‘한밤중에 허둥지둥하며 몰래 천위(天位)를 옮긴다’는 등의 말로 민심을 동요시키고, 북문(北門)으로 잠입하여 마침내 그 계획을 이루었습니다.”
하며 경종대 왕세제 책봉을 건의하였던 신하들의 신원을 주장하였다. 소론들은 이의연의 상소가 되자, 선왕을 욕되게 한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죄를 다스릴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였다. 영조는 처음에는 이의연을 죄줄 생각이 없었으나 소론들이 몇 날 몇 일을 계속해서 그를 죄주어야 한다고 하자 어쩔 수 없이 그를 섬으로 귀양보내고 말았다. 그러나 영조로서 여기서 소론에게 굴복할 수는 없었다.
이에 소론의 김일경이 신임옥사 당시에 작성했던 토역반고문(討逆頒敎文)을 들이라 하고는, 그 교문에서 ‘접혈금정(蝶血禁庭)’, ‘회인종무(懷刃鍾巫)’의 구절을 문제삼아 그의 관직을 삭탈하고 섬으로 귀양보냈다. ‘접혈금정’이란 궁중의 피를 밟는다는 뜻으로 당나라 태종이 그 형 건성과 그 아우 원길을 죽였을 때 궁중의 길에 피 흔적이 있었다는 데서 연유한 말이다. ‘회인종무’는 우부(羽父)가 종무와 내통해서 칼을 들고 들어가 노은공을 죽이고 그 아우 노장공을 세웠다는 데서 연유한 말이다. 그 뒤에 김일경은 목호룡과 함께 영조가 친히 하는 국문에 불려 들어와서는, 임금에게 간혹 ‘나’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였으며, 이 국문 후에 결국 두 사람은 죽음을 맞이하였다.
이후에도 한동안은 소론의 이광좌가 중심이 되어 조정이 운영되었다. 그러나 영조 1년(1725) 승지 윤봉조는 시비를 명확하게 밝힐 것을 주장하면서,
“김일경(金一鏡)·박상검(朴尙儉)·목호룡(睦虎龍)이 안팎에서 화응(和應)한 정상을 성상께서 이미 통촉하고 계십니다. 김일경이 신축년에 상소한 뒤에 박상검의 옥사가 나왔고, 그 후 목호룡의 변서(變書)가 올라왔고 또 그 뒤에 김일경의 교문(敎文)이 나와서 절절(節節)이 서로 부합되니, 이는 부인(婦人)들과 어린아이도 함께 아는 바인데, 의리(義理)가 어둡게 막히고 인심이 함닉(陷溺)되어 비록 반드시 모두가 김일경과 같은 마음이 있다고는 할 수 없으나, 그들과 동류(同類)인 까닭에 삼사(三司)에 있는 자들로 그 죄를 분명하게 말하는 자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여 당시에 삼사에 있던 소론들까지 공격하였다. 윤봉조 상소를 계기로 노론들이 소론을 탄핵하는 상소가 계속 이어졌다. 결국 윤봉조의 상소를 계기로 소론으로서 삼사에 있던 관리들뿐만 아니고 이조참의 조원명과 예조판서 이진검 등을 파직시켰으며, 얼마 후에는 소론의 영수격인 영의정 이광좌마저 파직시켰다. 그리고는 노론의 민진원과 정호·이만성 등 상당수의 노론들을 조정에 배치하였다. 뿐만 아니라 목호룡의 고변으로 발생한 임인옥을 무고한 옥사로 규정하였으며, 신임옥사 중에 죽음을 맞이한 노론사대신(이건명·이이명·김창집·조태채)을 모두 복관시키고 시호를 내렸으며, 그들의 제향을 위한 사충서원을 세웠다. 노론 명분이 승리한 것이었다.
노론들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계속해서 그 여죄를 몰아 소론들을 역적으로 몰아세우며 그들의 처벌을 주장하였다.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영조가 하루 종일 접하는 것은 노론 측에서 올린 소론의 처벌 주장에 대한 것이었다. 영조 자신도 어찌 보면 피해자라고 할 수 있어 이들의 요구를 들어주기는 하였지만 조정이 날마다 정쟁으로 소란스러운 것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갈수록 노론들의 요구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정의 안정을 바라던 영조는 결국 그 동안 자신 때문에 고생했던 노론들 대신에 소론들을 선택하게 되었다. 1727년 소론의 유봉휘·조태구·최석항 등의 관직을 복구하였고, 유배되었던 소론의 관리들을 대거 다시 불러들였다.
중앙의 조정이 소론에서 노론으로, 노론에서 소론으로 주도세력이 바뀌는 등 혼란이 가중되는 가운데 지방에서 이상한 기류가 포착되었다. 바로 경종독살설이 유포되면서 영조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반란세력을 모으고 있었던 것이었다. 경종독살설이라 함은 경종이 영조와 노론세력에 의해서 독살되었다는 설로, 당시 소문에는 경종이 왕세제(후일의 영조)가 보낸 게장을 먹고 죽었는데, 게장에 독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특히 이런 소문이 확산된 데는 경종의 처남인 심유현이 경종의 시신을 검시한 후 제기했다는 사실은 공신력을 더하여 더욱 확산되었다.
경종이 독살되었다는 소문은 그 동안 조정에서 소외되었던 남인들과 영조가 즉위하면서 제거되었던 소론세력, 특히 준소세력들에게 좋은 구실이 되었다. 박필현·이인좌·정희량 등은 이 소문을 구실로 각각 호남과 호서, 그리고 영남에서 반란세력을 규합하였다. 반란세력에는 지방의 토호뿐만 아니라 유민(流民)이나 노비 등 그 동안 소외되었던 세력들도 포함되었다. 반란 주도세력들은 나아가 거사의 성공에는 중앙에서의 호응이 필수적이라는 판단하에 중앙에서 활동하고 있던 인물들도 반란세력으로 규합하였다. 평안감사 이사성, 포도대장 남태징 등이 중앙에서 호응한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이 점은 이전까지의 반란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었다. 이렇게 중앙에서 활동하던 고관들이 반란에 가담한 적은 전무하였다.
반란은 영조 4년(1728) 3월 15일 이인좌가 청주성을 점령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반란세력들은 억울하게 죽은 경종의 원한을 갚고 소현세자의 증손인 밀풍군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한다고 하였다. 청주성을 점령한 반란군은 절도사 이봉상과 토포사 남연년을 죽였다. 사실 반란 초기에 반란세력인 권서봉 등이 양성(陽城)에서 군사를 모아 청주에서 이인좌와 합류하기로 하고 군사를 데리고 청주 경내로 몰래 들어왔다. 또 거짓으로 장례를 지낸다고 하면서 상여에다 무기를 싣고 고을 성 앞 숲속에다 몰래 숨겨 놓았다.
이때 청주에는 적이 이르렀다는 말이 무성하였는데, 이봉상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말하는데도 듣지 않고 아무런 방비도 하지 않았다. 이날 밤에 반란군은 이봉상이 깊이 잠든 틈을 타 큰 소리로 외치며 관청으로 돌입하였다. 당황한 이봉상이 이리저리 숨을 곳을 찾아 헤매다가 반란군에게 잡혔다. 그러자 이봉상이 크게 꾸짖기를,
“너는 충무공(忠武公) 집안에 충의(忠義)가 서로 전해져 오고 있음을 듣지 못했느냐? 왜 나를 어서 죽이지 않느냐?”
하고 크게 세 번 외치니, 드디어 죽였다. 이봉상은 이순신의 후손이었다. 그런데 이 순간 이봉상의 군관이었던 홍임이 변을 듣고는 돌입하여 이봉상 위에 엎드리며 말하였다.
“내가 진짜 절도사다.”
하니, 적이 끌어내어 항복하라 협박했으나, 그는 끊임없이 욕을 퍼부었다. 이인좌가 탄복하면서 말하였다.
“이는 충신이다. 죽이고 싶지 않지만 나를 죽일까 염려되기 때문에 죽인다. 그러나 일이 성사된 후 너의 후손을 녹용(錄用)하겠다.”
홍임이 다시 꾸짖기를,
“나에게는 본디 아들이 없지만 있다 하더라도 어찌 너 같은 역적에게 등용되겠느냐?”
하고는 드디어 죽었다. 반란군은 이어 진영(鎭營)에 들어와 영장(營將) 남연년에게 항복하라 협박하였다.
“네가 만약 항복하면 장차 크게 등용하겠지만 항복하지 않는다면 참(斬)하겠다.”
그러자 남연년이 꾸짖었다.
“내가 나라의 후한 은혜를 입었고 나이 70이 넘었는데, 어찌 개새끼 같은 너희를 따라 반역을 하겠느냐?”
반란군이 꿇어앉지 않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칼로 무릎을 쳤으나, 끝내 무릎을 꿇지 않고 말하기를,
“어서 내 머리를 베어라.”
하면서 끊임없이 꾸짖다가 죽었다. 이인좌가 청주성을 점령한 후 각지에서 반란세력들이 속속 청주성으로 집결하였다. 청주성을 중심으로 반란세력들이 집결하던 즈음 조정에서는 봉조하 최규서의 고변을 통해서 비로소 반란이 일어났음을 알았다. 최규서의 고변으로 반란을 알게 된 조정에서는 소론 오명항을 반란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토벌하도록 하였다. 반란군의 기세는 좀처럼 꺽이지 않았다. 당시 도순무사 오명항은 반군이 청주에서 죽산과 안성으로 진군하여 안성군수를 습격하려는 계획을 미리 정탐하였다.
이에 토벌군을 직산으로 진군케 하여 중도에 진로를 바꾸는 유인책으로 반군 측에서 관군의 진격로를 오판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안성에서 대승을 거두었던 것이다. 안성에서 패배 후 반란세력의 우두머리 이인좌는 패잔병을 이끌고 죽산으로 향했지만 곧 관군의 추격을 받아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고 반군도 진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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