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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야기 조선
왕조사

붕당의 분화

성리학적 이상사회 건설을 위하여

선조는 등극하자 몸소 정무를 모두 살피게 되었던 바, 치적이 매우 놀라웠다. 그리고 학문을 좋아한 그는 어진 선비들을 불러 썼다. 동고 이준경과 같은 원로 유신은 물론, 율곡 이이(栗谷 李珥), 퇴계 이황(退溪 李滉) 등의 거유(巨儒)가 조정에 드나들어 맑고 밝은 기운이 조야에 가득하게 되었다. 15세기 후반 이후 중앙에 진출하면서 훈구세력과의 대립과정에서 몇 차례 사화를 겪으며 많은 피해를 입었던 사림세력들이 비로소 정치를 주도하게 된 것이었다. 이로써 조정에는 새롭고 활기찬 기운이 확산되었다. 새롭게 정치를 주도하게 된 사림들은 그간 훈구세력들이 독주하면서 발생한 여러 정치, 사회적 폐해를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나갔다. 이 과정에서 사림들 내에 이견이 발생하면서 분파되다가 결국 선조 8년(1575) 사림세력이 동인과 서인이라는 붕당으로 분화되었다.

이때 붕당의 분화는 직접적으로는 심의겸과 김효원의 대립에서 발생하였다. 이 심의겸과 김효원의 대립이야말로 당시는 물론 후일 사류의 대분열을 폭발시킨 도화선이 되었다. 심의겸은 외척으로서 인순왕후의 동생이었다. 원래 사림들은 외척들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거부하였다. 그러나 심의겸의 경우 명종 말 사림을 비호하여 또 다른 사화를 막은 공로가 있다 하여 사림들이 그렇게 배척하지만은 않았다. 김효원은 신진사림으로서 신진들을 많이 천거한 까닭에 후배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호조낭관계회도〉

조선 중기 작자 미상의 계회도. 이 작품에서는 계회 장면이 산수 배경 못지않게 중요하게 다루어져 있으며 실내에서 계회가 열리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 점도 크게 달라진 양상이다. 낭관권의 신장과 역사적 맥락을 같이 하면서 그려진 그림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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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김효원이 출세하기 전에, 권신 윤원형의 사위인 이조민과 친하여 윤원형의 집에서 기숙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 심의겸이 마침 무슨 볼일이 있어서 윤원형의 집에 찾아 갔다가, 윤원형의 사위 방에 침구가 많은 것을 보고,

“누구의 침구이냐?”

하고 물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김효원의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이때 김효원은 아직 과거에 급제하지는 않았으나 문장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김효원의 것이라는 소리를 들은 심의겸은 말하였다.

“어찌 문학하는 선비로서 권세있는 집의 무식한 자제들과 함께 거처할 수 있는가? 결코 절개 있는 선비가 아니다.”

그 후 김효원은 과거에 장원하여 문명이 날로 높아지매 당시 이조좌랑에 있던 오건(吳健)이란 사람이 그를 전랑(銓郞)으로 추천하려 하였다. 전랑이란 인사를 담당하는 관서의 낭관이라는 뜻으로, 흔히 이조와 병조의 정랑(5품)과 좌랑(6품)을 통칭하는데, 여기서는 이조의 전랑을 말한다. 오건이 김효원을 추천하자 그때 이조참의였던 심의겸이 앞서 윤원형 집에서 있었던 일을 들어 완강히 거절하였다. 그러나 그 뒤 마침내 김효원은 좌랑이 되었다. 그는 도리어 심의겸이 사소한 일을 가지고 자기의 출세길을 방해하려 했다고 몹시 원망하면서 말했다.

“심은 미련하고 성질이 거치니 크게 쓸 수는 없다.”

그러던 차 이번에는 어떤 사람이 심의겸의 아우 충겸(忠謙)을 이조좌랑으로 추천하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때 김효원은 이를 허락하지 않으면서,

“어째서 (좌랑이) 외척 집안의 물건인가. 심씨 문중에서 반드시 차지해야 한다는 말이냐?”

하였는데 이것이 양가 불화의 원인이며 분당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리하여 당시의 사류들은 완전히 두 갈래로 나뉘어서 심의겸을 지지하는 세력을 서인(西人)이라 하고, 김효원을 지지하는 세력을 동인(東人)이라 하였다. 동인이니 서인이니 하게 된 이유는 김의 집이 서울 동편인 건천동에 있었기 때문이며, 동인에는 주로 젊은 신진들이 참여하였다. 심의겸의 집은 서울 서편인 정릉동(오늘날의 정동)에 있었는데, 주로 연로한 인사들이 그를 지지하였다.

심의겸과 김효원의 대립으로 비롯된 동인과 서인의 분당은, 위에서 보듯이 마치 양자의 해묵은 감정의 결과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이러한 논리가 일제시대 식민사학 논리의 하나인 당파성(黨派性)의 논리를 구성하는 한 요소였다. 조선의 붕당은 개인적인 감정에 의해서 분파되고, 국가나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기보다는 사리사욕만을 추구하는 추잡한 사당(私黨)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사례를 좀 자세히 보다보면 반드시 개인의 사적인 감정만이 동인과 서인의 분당으로 이어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양자간 대립은 이조전랑이라는 관직이 발단이 된 것이다. 조선 초기 이조전랑은 품계상으로 볼 때 중견실무 관리 이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15세기 말 이후 사림세력이 중앙으로 진출, 이들이 주로 언관직과 낭관직 등에 진출하면서 자신들의 결속을 강화하고, 동시에 이를 통해 정치적 입지의 강화를 위해 자천제를 관행화하여 갔다.

즉 이조전랑의 후임을 스스로 추천하는 제도로 추천의 기준은 덕(德)이었다. 이렇게 되면서 사림세력들은 이조전랑을 선호하게 되었으며, 이조전랑은 연소한 젊은 문신들이 중앙의 대신급 관료들과 맞서는 제도적 장치였던 것이다. 분명히 앞 시기와는 다른 정치운영 스타일이었다. 이렇게 이 시기 분당은 이조전랑이라는 관직을 매개로 해서 동인과 서인으로 나누어진 것이며, 이는 성리학적 이상사회라는 공통의 목표하에 정치의 방향을 어떻게 나아가게 할 것인가 하는 점까지도 연결된 중요한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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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집필자 소개

국민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사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후기 정치사를 전공했으며, 현재 국민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출처

이야기 조선왕조사
이야기 조선왕조사 | 저자이근호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조선왕조 500년의 인물과 사건을 대화 형식으로 서술한 <이야기 조선왕조사>. 조선의 역사를 '이야기식'으로 정리하면서 500년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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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붕당의 분화이야기 조선왕조사, 이근호,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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