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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사
홍경래의 반란
안동 김씨 김조순을 중심으로 한 세도정치가 행해지면서 정치·사회 여기저기서 문제들이 드러났다. 더욱 심한 것은 관직 진출이 몇몇 가문에 집중되면서 이들에 의해 권력형 비리들이 자행되었다는 점이었다. 이런 파행적인 정치에 반발해서 대규모로 발생한 반란이 순조 11년(1811) 홍경래의 난이었다.
“이번에도 또 낙방이로구나!”
홍경래는 깊은 시름에 젖었다.
“내가 생각을 해도 이만하면 누구보다 뛰어난 글인데……”
그는 자기 실력에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참방(參榜 : 과거에 급제하여 방목에 이름이 오르는 것)이 되지 않은 데는 어찌하랴! 전에 낙방을 하고 나자, 그는 이를 악물고 죽을 힘을 다하여 상투끈을 천정에 매달고 다리를 송곳으로 찔러가며 몇 해를 두고 글공부에 열중하였다. 그야말로 과거를 보기 위하여 와신상담하였고 과거령이 내리자 또 평안도 용강현에서 변변히 노자도 없이 불원천리하고 한양까지 올라와서 과거를 보았던 것이다. 그런 것이 재차 낙방이 되고 말았다.
“서북 태생이 무엇이 될 줄 알고 과거를 보는가? 보는 사람이 틀렸지!”
“바보지. 헛수고 말라고 해도 고지식하게 과거를 보니 될 게 무엇인고? 지벌(地閥)을 모르느냐?”
같은 고향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타일렀던 것이다. 급기야 지벌이구나! 그러나 이것을 어느 때까지 그대로 두면 우리 고장 사람들은 어찌 되며, 또 이런 악습은 단연코 없애야 되겠다.
홍경래는 이렇게 결심하고 세도가의 문을 두드렸다.
“일초시라도 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애원을 하고 다녔으나, 아무도 대해주려고 하지 않고 도리어 홀대만 받았다. 그는 불평과 불만을 품게 되어 그와 같은 불만에 사로잡혀 있는 곽산 사람인 우군칙(禹君則)을 알게 되자 서로 왕래하다가 급기야 우군칙이,
“대장부가 세상에 나서 어찌 큰 뜻을 펴지 못하고 죽겠소? 우리 한번 일어나 겨루어 봅시다.”
이런 말을 하니 홍경래는 당장 이에 호응하였다. 편당과 지벌, 그리고 뇌물로 일삼는 조정의 그릇된 신하들을 쳐부수자는 것이었다. 홍경래는 곧 상경하여 영상으로 있는 김재찬을 찾아가,
“기왕 벼슬은 할 길이 없으니 장사 밑천이나 구해주소서.”
그리하여 영상에게 편지를 얻어 평안감영으로 내려와 공납전 2천 냥을 얻었다. 이로부터 홍경래는 주야로 뜻을 같이 하는 무리를 모았으니, 가산의 이희저, 황주 사람인 김사용, 개천의 이제초 등이 그의 밑에 모였고, 또 한편 마침 서북지방에 큰 흉년이 들었던 때를 이용하여 태산, 운산 등지에 금광을 한다는 풍설을 퍼뜨려 사람을 모아서 슬그머니 군사 조련을 하였다. 홍경래는 스스로 평서대원수라 일컫고, 김사용을 부원수, 이제초를 전군장군, 이희저를 후군장군, 그리고 우군칙을 모사로 삼았다. 이리하여 ‘홍총각’이란 자를 선봉장으로 하여 가산읍부터 침범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가산군수는 정저(鄭著)란 사람으로 강직한 무변 출신이었다. 정저가 홍경래 일당이 침노한다는 소식을 듣고 감영에 이 뜻을 전하는 장계를 적고 있는데 멀리서 군마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정 군수는 일이 심상치 않음을 알고 관인을 간직하려고 하는데 몰려들어온 적이 그의 목덜미를 잡았다. 그는 적에게 끌려 동헌으로 나가니, 이미 홍경래가 대청 위에 높이 앉아서 소리를 치는 것이었다.
“가산군수, 항복하라.”
이 말을 들은 정저는 서슴지 않고,
“네가 누구이기에 항복하라고 하느냐?”
하며 대드니, 홍경래는 더욱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평서대원수를 모르느냐? 조정의 간당들을 쓸어버릴 작정으로 의병을 일으켜 나가는 길에 너부터 항복을 받으려는 것이다.”
“네가 감히 도당을 모아 나라를 어지럽히느냐? 네가 곧 대가리 없는 귀신이 될 줄을 모르느냐?”
정저가 이렇게 항거하니, 홍경래는 정저가 관인을 들고 있는 오른쪽 손을 치게 하여 관인을 빼앗게 하니 정저는 왼쪽 손에 관인을 고쳐 쥐고 놓지 않으려고 했다. 홍경래는 또 오른쪽 팔을 치게 하였다. 정저는 피를 흘리면서도 관인을 입에 무니, 급기야 정저의 목을 쳐서 떨어뜨렸다. 이어서 정저의 부친 정노(鄭魯)도 죽고 정저의 동생 역시 칼을 맞았으나 수청기생 옥랑의 간호로 소생하였다.
홍경래는 이렇게 가산을 침로하고 나아가서 박천을 포위하여 안주 병영을 손에 넣고 태산, 곽산을 침략한 다음에 선천을 에워쌌다. 그 당시 선천부사는 김삿갓[金笠]의 조부인 김익순이었는데, 홍경래의 협박에 못 이겨서 항복을 하고 말았으니, 이로 인하여 김삿갓은 세상에 나서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홍경래는 더욱 기세를 올려서 박천에 모든 군사를 모으고 동짓달 청천강의 얼음을 이용하여 강을 건너서 평양을 단번에 습격하려 하였다. 그러나 하루 사이에 강물이 풀려서 군사의 왕래가 불가능하게 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일이 급하게 되자, 순조는 영상의 말을 따라 이요헌(李堯憲)을 도순무사로 하고, 박기풍(朴基豊)을 순무중군으로 하여 홍경래 무리를 진압하게 하였던 것이다. 사방에서 보잘것없이 항복만을 계속하던 관군이 겨우 힘을 얻어 여러 곳에서 반군을 부수고 차츰 그들을 포위하여 정주성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반군도 상당히 굳센 터라 정주성을 쉽사리 내놓지 않자, 다만 보급로만을 끊고 몇 달을 서로 겨루고만 지냈다.
이렇게 되자, 새로 오게 된 정만석의 지략으로 성 한 귀퉁이를 폭파시키게 되었다. 이때 정만석은 순무중군장 유효원(柳孝源)을 시켜
“성에서 나와 투항하면 살려주겠노라.”
하고 방을 써 붙여 놓고 한편 성 북장대 밑을 몰래 파게 하여 화약을 묻고 화승을 달게 하였다. 양식이 끊어져서 허덕이던 성 안의 홍경래 군은 이 방을 보자 성을 빠져나가고 싶기도 하였으나, 반대로 살려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얼마를 망설이다가 부녀자들을 먼저 내보냈다. 부녀자들이 겁을 먹고 성을 나섰으나 관군은 아무 말도 묻지 않고 그대로 보내는 것이었다. 이래서 부녀자들은 안심하고 하나둘 성을 나와서 고향을 찾는 것이었다. 급기야 홍경래의 병졸들까지 홍경래에게 몰려들었다.
“성 밖으로 내보내 주십시오.”
이에 홍경래는 부하들에게 다시 한번 위협을 주었다.
“부녀자들은 살려주었지만, 우리까지 살려줄 것으로 아는가? 짐짓 백성들만 살려주고 우리를 꾀어내려는 술책이다. 청에 원병을 청했으니 그때에 관군을 포위 도륙하고 돈과 벼슬을 나누어 고향에 가도록 하자.”
이 헛된 말에 한 가닥의 희망을 건 부하들은 허리띠를 더욱 졸라매고는 다시 말을 타고 헛북만을 둥둥 울리면서 맡은 자리로 돌아섰던 것이다. 이러는 동안에 성 밖에서는 살려고 나오는 병졸이 없음을 알고 화약줄에 불을 붙였다. 한편 성 주위에는 많은 관군을 복병시키고 있었다. 성 주위의 적들은 그만 기아에 지쳐서 여기저기 쓰러져 있으니 쥐죽은 듯이 고요하기만 하였다.
“콰, 쾅, 쾅.”
이때 별안간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화약의 폭발과 함께 북장대가 산산조각이 되어버렸다. 장대를 지키던 이희저 이하 여러 병졸들은 시신도 찾을 길이 없게 되었다. 이제초가 총에 맞아 쓰러지고, 김사용이 사로잡혔다. 또 많은 사람이 어지러이 도망치다가 잡히거나 총에 맞았다. 홍경래와 우군칙은 상복을 얻어 입고 빠져나가려고 하였으나 급기야 관군에게 들키어 일제 사격을 받고 쓰러졌다. 이래서 조정에 항거하던 홍경래 일당은 피와 통곡으로 끝을 맺고 말았다. 홍경래가 주도한 난은 이렇게 끝났지만 이는 이후 전개되는 농민항쟁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후에 발생하는 농민항쟁에 홍경래가 미친 영향은 적지 않아, 1827년 제주도에서 조정을 비난하는 괘서가 붙었는데, 이 괘서를 붙인 주모자로 정상채가 검거되어 신문을 받았다. 정상채는 신문을 받던 도중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홍경래는 일찍이 죽지 않았다. 난리는 장차 해도(海島) 가운데서 일어날 것인데 진인(眞人)이 홍하도(紅霞島)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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