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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사
문물 정비와 사림세력의 등용
성종 즉위 후 정희왕후는 계속해서 수렴청정을 통해 정치에 참여하였다. 그러던 중 성종 6년(1475), 승정원에 한 장의 익명서가 걸렸다. 익명서에 대해 승정원에서 보고하기를,
“익명서(匿名書)가 승정원(承政院)의 문에 붙어 있었는데 찢어져서 전문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 가운데 ‘강자평(姜子平)이 진주목사(晉州牧使)가 된 것은 대왕대비(大王大妃)의 특명(特命)이다’ 하는 내용이 있었고, 또 윤사흔(尹士昕)·윤계겸(尹繼謙)·민영견(閔永肩)·어유소(魚有沼)·이철견(李鐵堅)·이계전(李季專)의 성명(姓名) 밑에 적(賊)자가 있었고, 많은 욕이 쓰여 있었습니다.”
하고는 이를 불태웠다고 보고하였다. 익명서에서 거론된 강자평은 강휘(姜徽)의 아들로서, 익명서가 걸리기 얼마 전에 진주목사에 제수된 인물이었다. 기록처럼 강자평이 진주목사가 된 것이 대왕대비의 특명에 의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이 시기는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던 시기였으므로 그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런데 문제의 본질은 바로 강자평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수렴청정을 하던 정희왕후를 목표로 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런 이유인지 성종도 승정원의 보고를 접한 직후에는 승정원에서 불태운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으나, 얼마 후 조석문의 건의를 받아들여 익명서를 붙인 자를 체포하도록 하고, 파격적인 현상금을 걸었다. 체포하거나 고발하는 자가 있으면, 천인(賤人)이면 양인(良人)이 되게 하고, 양인(良人)이면 자품(資品)을 세 자급 올려서 실직(實職)에 임명하며, 상품(賞品)으로 받기를 원하는 자는 면포(綿布) 4백 필(匹)을 주고 또 범인의 재산을 함께 주도록 하였다. 이러한 현상금이 실효를 거두어 얼마 후 친군위 권즙의 고발에 따라 박윤형과 최개지를 범인으로 체포하고 의금부에 수감함으로써 익명서 문제가 일단락되는 듯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정희왕후였다. 정희왕후로서도 이런 익명서가 걸리기까지 하였는데도 아무런 제스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박윤형, 최개지 등 관련 용의자를 엄하게 문초할 것을 지시하는 한편 수렴청정을 거둘 의사를 표시하였다. 처음에 성종은 이를 여러 차례 사양하는 의사를 보였다. 그러나 워낙 정희왕후의 의사가 확고하여 그 뜻을 쉽게 바꿀 수 없자 성종은 자신의 장인이기도 한 한명회에게 대비의 뜻을 바꿔보라고 지시하였다. 한명회는 바로 대비전으로 가서 아뢰기를,
“지금 만약 대비께서 정사를 내놓으신다면 이는 동방의 백성을 버리시는 것입니다. 신이 평상시에 대궐에 들어와 안심하고 술을 마셨는데, 만약 그렇게 하신다면 안심하고 술을 마실 수 없습니다.”
하며 의사를 바꿀 것을 강청하였으나 대비는 따르지 않고 수렴청정을 철회하였다. 이로서 명실상부하게 성종이 국왕으로 정사를 주관하게 되었다.
친정을 시작한 성종은 세조대부터 시작된 법전 편수 작업을 마무리짓고 조선조의 영세(永世) 법전인 《경국대전》을 반포하였다. 뿐만 아니라 노사신 등에게 명하여 《여지승람》과 《동국통감》·《삼국사절요》 등을 편찬케 하였다. 또 교서관에도 명하여 통치에 귀감이 되는 역대 중국의 역사책과 성리학 서적 등을 간행하였으니, 이때 간행된 서적을 보면, 《사기》·《좌전》·《사전춘추》·《전·후한서》·《진서(晉書)》·《당서》·《송사》·《원사》·《강목》·《통감》·《대학연의》·《고문선》·《문한류선》·《사문류취》·《구소문집》·《서경강의》·《천원발미》·《주자전서》·《자경편》·《두시》 등이었다. 성종의 이러한 업적은 건국 이래로 계속된 문물제도의 확립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성종대 이루어진 이러한 업적들은 물론 성종의 학문 연마와 이에 따른 뛰어난 개인의 자질과 능력에 힘입은 바이지만, 이와 함께 많은 인재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이러한 많은 인재의 등장은 또한 인재를 중시하고 그들의 양성에 주력하였던 성종의 입장에 따른 결과이기도 하였다. 성종은 학문에 뜻이 깊어 아침·낮·저녁 세 차례에 걸쳐 신하들과 학문을 강론하고 밤에도 자신이 설치한 홍문관의 당직 관원들을 불러 강론을 마치고는 편한 복장으로 마주앉아 술을 마시면서 역대 고금의 흥망성세와 민간의 병폐 등을 논의하였다. 한 번은 성종이 몸소 선왕 예종의 빈전인 경안전(景安殿)에 제향하고 경연에 돌아온 적이 있었다. 이때 경연을 주관하던 한명회와 최항은 성종에게 말하기를
“제사 지낸 후에 또 경연에 나오시니 옥체가 피로하실까 염려됩니다.”
하며 경연의 중지를 요청한 바 있다. 그러자 성종은 이에 개의치 않고,
“나는 하루의 시간도 아끼는데 재계하는 날은 할 수 없지마는 제사지낸 후에 경연을 정지할 수 없다.”
하며 경연의 시작을 지시한 적이 있다. 가끔 왕대비가 성종의 건강을 우려해서
“피로하지 않으시오?”
하고 묻기라도 하면, 성종은 이렇게 대답했다.
“읽고 싶어서 읽으니 피로한 줄 모르겠습니다.”
실로 호문(好文) 군주의 자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성종은 이처럼 자신이 스스로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였을 뿐만 아니라 젊은 인재를 공부시키고 발굴해서 등용하는 데에도 열심이었다. 그리하여 문신 중에 나이가 젊고 자질이 총명하고 민첩한 채수·양희지·유호인·조위·허침 등을 선발하여, 이들로 하여금 휴가를 주고서 장의사(藏義寺)를 내어주어 공부에만 전념하도록 하였다. 이를 사가독서제(賜暇讀書制)라고 한다. 얼마 후에는 아예 이들이 공부할 공간으로, 용산의 폐허된 절을 수리하여 독서당이라는 편액을 내려주기도 하였다.
성종은 자신의 치세 중반이 넘어가면서는 김종직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한 영남의 사림세력들을 등용하기 시작하였다. 김종직은 고려 말 조선의 건국 후 출사를 거부하고 낙향한 길재의 문인인 김숙자의 아들로서, 김종직을 중심으로 한 이들 영남 사림들은 건국 초에는 출사를 거부하고 초야에 은거하면서 성리학에 침잠해 있었다. 김종직이 중앙 정계에 진출한 것은 세조 5년(1459)부터이며 이를 계기로 미미하지만 사림세력들이 서서히 중앙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당대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훈구세력에 비해서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은 미미하였다. 그러나 성종의 경우는 훈구세력을 견제한 일군의 세력으로 이들을 주목하여, 기회가 되는 대로 김종직의 문인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그리고는 이들을 홍문관과 대간직에 포진시켰다. 이들에게 언론활동을 통해서 훈구세력을 견제하도록 한 것이었다. 성종대를 일부에서는 태평시대라 평가하는데, 이런 평가가 가능했던 것은 바로 뛰어난 성군의 자질을 보였던 성종, 그리고 성종의 주도하에 훈구세력과 사림세력이 균형을 이루면서 왕권이 안정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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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문물 정비와 사림세력의 등용 – 이야기 조선왕조사, 이근호,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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