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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야기 조선
왕조사

어머니를 폐하고 형제를 죽이다

임해군을 죽인 다음, 광해군의 의심의 눈초리는 영창대군에게 쏠리었다. 부왕 선조가 그렇게도 귀여워하던 그 아들이었던지라, 영창대군의 존재는 항상 광해군의 왕권에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광해군에게 엉뚱한 방향에서 호기가 다가왔다. 광해군 5년(1613) 유명 가문의 서자 7명이 연루된 모반 사건이 발각되었다. 박순의 서자 박응서를 비롯해 서양갑·심우영·이경준·박치인·박치의·허홍인 등은 서자로서 관직 진출이 막힌 것에 대해서 울분을 품고 생활하였다. 그러던 중 박응서 등이 조령에서 은상(銀商)을 살해하고 은을 약탈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을 흔히 칠서지옥(七庶之獄)이라 한다.

문경새재 제2관문 조곡관

문경은 영남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중요한 교통로로서 사람과 물화의 이동이 많았던 곳이었기에 박응서 등이 이곳에서 거사를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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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된 박응서 등은 포도청에 수감되어 치조를 받았는데, 치조받던 중 박응서에게 은밀한 제안이 왔다. 바로 포도대장 한희길이 죄를 감해주는 대가로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대비의 친정아버지 연흥부원군 김제남이 영창대군을 추대하고 역모를 한다고 아뢰게 하였다. 그 말을 들은 광해군은 기다렸다는 듯이 김제남을 잡아 죽이고 그의 일족을 도륙한 다음, 인목대비의 어머니인 부부인(府夫人) 노씨(盧氏)를 제주도로 귀양보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창대군을 없애기 위하여, 광해군은 나인들에게 명하여 영창대군을 데려오라 하였다. 이에 나인들이 달려가 영창대군을 안고 가려 하자 인목대비는 눈물과 호령으로 그들을 꾸짖으며 내어 놓지 않았다. 그들이 하는 수 없이 돌아가 광해군에게 사실을 아뢰자, 광해군은 미친 듯이 대비 처소로 달려가,

“영창이 역률을 범하였으니, 내어주셔야 국법이 바로 서겠소.”

하고 호통하였다. 그러나 대비는 두 손으로 그 사랑하는 아들을 꼭 껴안고,

“다섯 살 먹은 어린애가 무슨 역률이오, 죽이려면 나를 죽이시오.”

하며 내어주지 않았다. 그러나 광해군은 와락 달려들어 대비를 억누르고 기어이 영창을 빼앗아 갔다. 통곡하는 대비의 울음소리도 못들은 척하고. 영창대군을 탈취해간 광해군은 그래도 세상의 이목을 꺼리어,

“영창은 선조의 자식이 아니다.”

이런 억설을 퍼뜨려 대비에게 망극한 누명을 씌운 다음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내어 몰았다. 그때 이원익이 그 부당함을 지적하고 직간하다가 마침내 쫓겨났다. 영창대군이 강화도로 정배된 뒤, 간사한 무리들은 끊임없이 상소하여 그를 죽여야 한다고 떠들어댔는데 광해군은 그 말들을 들을 때마다 차마 그렇게는 못하겠다는 양 몇 번이고 사양하는 척하다가, 이윽고 국법을 어길 수 없어서 부득이 교동으로 옮겨다가 방에 가두고 불을 때 질식시켜 죽게 하였다. 그때 영창대군의 나이 겨우 일곱 살, 세 살에 부왕을 여의고 다섯 살에 어머니 품을 떠나 외로운 섬 속에 갇히어 밤낮을 울며 지내야 했다.

영창대군을 죽인 광해군에게 걸림돌인 인목대비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인목대비를 처리하는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았다. 얼마 후 광해군 8년(1616) 1월 경운궁에 광해군을 비방하는 익명서가 날아들어 왔다. 기자헌이 대비와 협력하여 유희분과 박승종을 몰아낸 다음 큰 일을 도모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광해군은 조신들을 모아 놓고는 그에 대한 대책을 논의하였다. 성균관 유생들의 폐비 상소가 제출되었으며, 이이첨과 허균(許筠)은 김개(金介) 등을 시켜 무뢰배와 거지들을 모아서 유생의 복색을 입혀 놓고, 궐문 밖에 엎드려서 대비는 역적이니 어서 폐서인하여 추방함이 옳다고 아뢰게 하였다.

조정에서도 한효순이 백관을 거느리고 들어가 폐모를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이이첨은 모든 것을 자신이 조종하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있다가 유생들의 상소와 한효순의 정청(廷請 : 세자나 삼정승이 모든 벼슬아치를 거느리고 궁정에 이르러 큰일을 임금께 아뢰어 하교를 기다림)을 빙자하고 이위경(李偉卿)을 시켜 폐모소(廢母疏)를 지어 올리게 하였다. 그리고 문무 백관들에게 찬성 서명하기를 강요하였다. 일부는 회피하고 서명을 아니하였으며 특히 원임대신 이원익과 기자헌(奇自獻)은 강경히 반대하였다.

또한 이항복은 신병으로 요양하고 있다가 그 말을 듣고 참지 못하여 강경한 어조의 반대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이들 반대세력들은 계속된 대간들의 탄핵을 받아, 마침내 이원익은 관직을 삭탈당한 뒤 남해로 귀양갔다가 수원으로 옮겨졌다. 기자헌과 이항복은 처음 정평과 용강으로 정배되었다가, 승지 백대연(白大衍)의 못된 혀뿌리에 걸려 죄가 중하다고 삭주와 창성으로 가게 되었다. 다시 기자헌은 종성으로, 이항복은 북청으로 옮겨졌다.

철령 높은 재를 쉬어 넘는 저 구름아.
고신(孤臣) 원루(怨淚)를 비삼아 실어다가
임 계신 구중 궁궐에 뿌려 준들 어떠리.

이 노래는 그때 오성 이항복이 북청으로 귀양가면서 지은 것이다. 이항복과 기자헌을 귀양 보낸 다음, 이이첨 등은 정청에 참여하지 않은 정창연(鄭昌衍) 등을 ‘십사(十邪)’라 하여 내몰아 정배시키고 의창군 등 20여 명도 그렇게 하였다. 그리고 늙고 병들어 참여하지 못한 재상들은 모두 벼슬을 깎아버리고 나서, 끝내는 저희들 뜻대로 인목대비를 폐서인하여 경운궁으로 내몰았다. 이것을 가리켜 계축사화(癸丑士禍)라고도 한다.

앞서 친형 임해군을 제거하고, 또 이때에 와서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였으며, 부왕의 계비로 자신에게 어머니뻘인 인목대비를 경운궁에 유폐시킨 광해군과 대북세력의 움직임은 개인적인 감정이 전혀 개입되지 않았다고 볼 수 없으나, 이들이 결국에는 광해군이 왕권을 강화하는 과정에 장애물이 될 것임은 뻔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일련의 사건을 단순하게 인륜적 차원에서 이해하기보다는 광해군 초기의 왕권 강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선조대왕실록수정청의궤》

1641년 2월부터 1657년 9월까지 《선조실록》을 수정한 과정을 기록한 의궤이다. 《선조실록》은 본래 광해군 즉위 후에 편찬되었으나, 인조반정 후 새로 집권한 서인들에 의해서 1657년에 수정본이 만들어졌다. 정치세력의 변동에 따른 실록 수정 사례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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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집필자 소개

국민대학교 문과대학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사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후기 정치사를 전공했으며, 현재 국민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출처

이야기 조선왕조사
이야기 조선왕조사 | 저자이근호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조선왕조 500년의 인물과 사건을 대화 형식으로 서술한 <이야기 조선왕조사>. 조선의 역사를 '이야기식'으로 정리하면서 500년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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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어머니를 폐하고 형제를 죽이다이야기 조선왕조사, 이근호,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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